담배를 문 그의 이 얼굴은 대중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으나, 그의 집은 거의 기억되지 않는다
#1 - 그의 집은 어디인가
사람들이 내게 고향을 묻는 경우 나는 대답을 머뭇거리곤 한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이듬해 광주로 내려와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모든 시간을 광주에서 보냈기 때문. 카뮈 역시 아마 고향을 물으면 대답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1913년 알제리 동부의 드레앙 Dréan(당시 이름은 몽도비 Mondovi)에서 태어난 후 바로 이듬해 알제 Alger(알제리의 수도)로 이사 왔으니 말이다.
어느 한 작가를 좋아한다고 가정하면 먼저 그의 작품들을 찾아 읽을 것이고 그다음은 그가 살았던 고향과 집에 다녀오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위대한 작가의 숨결이 닿은 과거의 공간에서 어떤 비밀을 찾고 싶은 욕망 때문일 텐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카뮈를 좋아하는 이는 드레앙이 아닌 알제에 있는 집에 우선 들르는 게 나을 것이다. 그는 알제의 벨쿠르 Belcourt 동네에서 1931년까지 살았는데, 이는 그의 유아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거의 모든 시간에 해당된다.
정확히 말하면 카뮈 외할머니 소유인 이 작은 집에 그의 가족이 얹히게 된 이유는 그의 아버지의 사망 때문이었다. 독일은 프랑스로 선전포고를 했던 1914년, 그의 아버지 뤼시앵 카뮈 Lucien Camus는 알제리 원주민 보병으로 징집된 후 프랑스 본토로 보내졌는데, 불행히도 그는 채 2달도 되지 않아 마른 전투의 부상에으로 인해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내가 처음 알제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보기로 결심한 때는 2013년이었는데, 출발하기 전 그의 정확한 집 주소를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마땅한 한글로 된 자료가 없어 프랑스어로 된 사이트를 뒤졌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1962년 알제리 독립 이후 알제리에 있던 대부분의 프랑스인은 본국으로 급하게 돌아갔고, 그 이후 프랑스에서 알제리로의 인력 이동이 많지 않았기에 프랑스 내에서도 알제리에 대한 정보가 적었기 때문으로 나는 추측한다. 사이트 내에서 사람들은 벨루이즈다드 거리 Rue Belouizdad의 93번지가 카뮈의 집인지 아니면 124번지인지에 대해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거리의 현재 명칭은 Rue Mohamed Belouizdad (모하메드 벨루이즈다드 거리)이다나는 우선 93번지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번지 구성은 프랑스식이었기 때문에 길의 어느 한쪽에 홀수 번지수를 가진 건물이 보이면 그쪽은 모두 홀수를 가진 건물들이 있었다. 93번지 건물에 도착해서 보니 1층은 상점으로, 2층에는 살림집으로 구성된 건물임을 알 수 있었다.
2013년에 찍은 93번지 건물의 전경그 여러 상점들 중 나는 휴대폰 가게에 들어갔고, 넉살 좋아 보이는 가게 주인에게 질문을 했다.
"여기가 카뮈의 집이 맞나요?"
주인아저씨는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위 층에 살았죠."
가게 주인의 대답에도 나는 이 집이 카뮈의 집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었고 바로 124번지를 찾아 다시 길을 따라 걷었다. 그곳을 향하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혹시 카뮈의 집을 아세요?"
대략 10명 정도에게 물었지만 그중 카뮈를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124번지에 도착하고 난 다음 바로 그 옆에 있는 카페 주인에게 물었을 때, 그 날 두 번째로 카뮈를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
124번지 건물
124번지 건물은 총 3층으로 된 집이었는데,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계단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달팽이처럼 원형을 그리는 계단을 올라 2층에 오르면 양쪽으로 각각 대문이 보이는데, 이는 한 층에 총 2가구가 산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중 왼쪽의 집 앞에 서서 노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어렵사리 노크를 했는데,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지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건물의 옥상까지 올라가 보았지만, 과연 두 곳 중 어느 곳이 그의 집인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24번지 옥상에서 바라보는 거리의 풍경
나는 당시 카뮈의 작품을 많이 모르던 때라 그의 작품 안에서의 묘사를 근거로 진짜 그의 집을 알아낼 방법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가 읽고 있던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 책에서는 카뮈의 집이 124번지라고 말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그렇게 믿어왔고, 이후 나는 가끔 지인들과 산책 삼아 124번지의 집을 찾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프랑스의 카뮈 연구가인 미셸 옹프레이 Michel Onfray가 93번지가 카뮈의 집이라고 말하는 걸 알게 되었고, 카뮈의 집은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한 의문이 새롭게 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카뮈의 작품에서 그의 집이 어떻게 묘사됐는지를 근거로 그의 집에 대한 조사를 했다.
그의 산문집 『결혼 · 여름』, <긍정과 부정 사이> 53페이지에 정확히 '2층밖에 안 되는 집'이라는 표현과, 그의 전기문 <지상의 인간> 1권에는 나온 '세 집이 복도에 있는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했다'는 표현이 있다. 이를 근거로 나는 93번지가 그가 살았던 집임을 어렵지 않게 추론해낼 수 있었다. 93번지 건물의 경우 2층짜리 집에 여러 가구가 공동생활이 가능한 구조이지만, 124번지 건물의 경우 3층짜리 집에 단 2가구가 위치한 구조이기 때문. 이제껏 나의 소개로 124번지를 카뮈의 집으로 알게 된 지인들에게 이 글을 통해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나는 6년 만에 다시 93번지의 집을 찾았다. 여전히 그 건물 아래층에 핸드폰 가게가 있을지도 궁금했다.
사진의 가운데 보이는 하얀색 건물
여전히 있는 핸드폰 가게. 간판이 예전보다 세련되게 변했다.
핸드폰 판매 매장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고, 나는 혹시나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가 나를 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매장 안에 들어갔지만 그건 그저 나만의 기대였다. 예전 주인이 아니었다. 핸드폰을 구경하는 대신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가게 주인이 무엇을 찾느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사실대로 답했다.
"카뮈 때문에 왔습니다."
"네, 맞아요. 2층에 살았죠. 저 문 뒤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2층으로 올라갈 수는 있습니다만, 사람이 살고 있으니 안 올라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저곳이 유일한 가요?"
"네"
저 여인의 뒤 쪽에 있는 닫힌 문을 열면 계단이 있다
계단으로 향하는 문은 닫혀있었고, 굳이 다른 손님으로 인해 바쁜 그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2013년에 계단을 찍었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발견했다
내가 계단을 보고 싶어 했던 이유는 그의 다음과 같은 표현 때문이다.
나는 빈민가에서 살던 어떤 어린아이를 생각한다. 그 동네, 그 집! 이층밖에 안 되는 집이었고, 층계에는 불도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는 한밤중에라도 그곳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 번도 발을 헛디디지 않고 그 층계를 단숨에 뛰어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 집은 그의 몸속에 찍혀 있는 것이다. 그의 두 다리는 층층대 하나하나의 정확한 높이를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의 손에는 아무리 해도 이겨낼 수 없었던 층계 난간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감이 남아 있다. 그것은 바퀴벌레 때문이었다. (『안과 겉』, <긍정과 부정 사이>, p.53)
집의 외부에는 그를 기념하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는데, 만약 이 집이 프랑스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를 기념하는 현판은 물론 주변에 기념품 가게가 줄지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대표작 <이방인>은 프랑스어로 된 저작물 중 <어린 왕자>, <해저 2만리>에 이어 세 번째로 전 세계에 많이 팔렸고 또한 68개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유명한 작품인데, 그런 위대한 작가가 살았던 집이 정작 현지에서 기억되지 않는다니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2 - 어머니의 공간
카뮈의 자전적 소설 <최초의 인간>에서의 묘사를 통해 그의 집 내부를 상상해볼 수 있다.
회칠을 한 방에는 가구래야 한가운데 놓인 네모난 탁자, 벽을 따라 붙여 놓은 찬장, 긁힌 상처들과 잉크 자국으로 뒤덮인 작은 책상, 그리고 땅바닥에는 저녁에 반벙어리인 삼촌이 누워 자도록 담요 한 장을 씌워 깔아 놓은 조그마한 매트리스, 그리고 의자 다섯 개가 전부였다.
가난한 살림이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이 좁은 집에서 카뮈는 할머니, 어머니, 삼촌, 형과 살았는데, 카뮈는 외부의 세계와 소통하게 되면서 자신이 극빈층이라는 점을 점차 깨닫게 된다. 학교에 같이 다니던 친구 집을 보거나 프랑스 본토에 대해 말해주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카뮈는 자신의 집이 정상적인 범주에 있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전쟁미망인인 그의 어머니는 빈약한 종신 연금을 받으며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카뮈는 학교에서 어머니의 직업을 적는 란에 과연 '하녀'로 적어야 할지에 대해 친구와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월말이 되면 아주 고무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어머니가 이렇게 말한다 : "오늘 저녁에는 밀크를 탄 커피를 마시기로 하자. 가끔씩은 기분 전환이 되거든......" (<작가수첩 Ⅰ>, p.133)
돈이 수금되는 월말이 되어서야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이 고작 밀크 커피였을 정도의 가난. 그렇지만 그에게 사실 가난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잊지 않았다. 노벨문학상을 타게 되었다는 소식에 그는 당장 알제에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는데, 그때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노벨상. 짓눌림과 우수가 함께 섞인 이상한 감정. 스무 살에 가난하고 헐벗은 처지였을 적에 나는 진정한 영예를 체험했었다. 나의 어머니. (<작가수첩 Ⅲ>, p.288)
그의 글에서 어머니는 자주 볼 수 있는 단어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그의 마지막 유작인 <최초의 인간>의 서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할 당신께
그의 어린 시절 집에서 어머니의 공간은 어디였을까. 카뮈의 기억에 의하면, 그녀는 덧문을 통해 거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 부드러우면서도 음울한 눈으로 식당의 닫아 놓은 덧문을 통해서 거리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창문들 중 하나를 통해 카뮈의 어머니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을 것이다카뮈는 성장한 후 이 집을 찾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파리를 떠나 아프리카로 갈 때는 매번 이런 기분이었다. 어렴풋하게 솟아오르는 희열, 부풀어 오르는 가슴, 멋진 탈출에 성공하여 경비병의 낯짝을 상상하면서 껄껄 웃어 대는 사람의 만족감. 육로로 혹은 기차로 돌아올 때마다 변두리 동네의 첫 번째 집들이 나타날 그즈음이면 그의 가슴은 죄어드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웠을지 상상이 가능하다. 거리는 카뮈가 태어나기 이전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 대부분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기에, 거리의 실루엣은 그의 시대와 비교했을 때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최근에 내가 이 곳을 찾았을 때는 벨루이즈다드 동네의 축구팀이 알제리 컵에서 우승을 하던 때라 거리 이곳저곳이 클럽의 상징인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붉은색으로 뒤덮인 벨루이즈다드 거리그와 대화를 나누던 어머니가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자 카뮈는 어머니의 자리에 앉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옛날과 똑같은 가게들은 햇빛 때문에 색이 바래고 칠이 벗겨져 있다. 오직 맞은편 담뱃가게만이 속이 빈 가는 갈대로 엮은 장막을 알록달록한 플라스틱의 긴 끈들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최초의 인간> 중)
카뮈의 집 맞은편 건물. 그가 말한 가게들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아이들에게 손 한번 대본 일이 없을뿐더러 심지어 진짜 큰 소리로 야단 한번 쳐본 일이 없었던 그의 어머니. 카뮈의 할머니가 회초리로 그를 때릴 때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말리지도 못하고 보고만 있을 정도로 수동적인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누군가 이렇게 물었을지 모른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들로 키워내다니 대단합니다. 자녀 교육의 특별한 방법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반벙어리에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그녀는 카뮈에게 제대로 된 책 하나 골라줄 수도 사줄 수도 없던 가난한 상황이었으니 더욱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시대로 돌아가 보자. 자식을 잘 키워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모의 철저한 교육계획, 모자라지 않는 경제적 뒷받침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중요한 것일까.
그렇기에 나는 카뮈가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좋다. 그가 사용하는 그 단어는 많은 것을 포용하고 무한한 경계를 보여주는 어머니의 사랑에 기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사랑에 여인에 대한 사랑도 포함이 되긴 하지만.
세계가 전쟁의 광풍에 휘몰아치던 때 어머니가 걱정된 카뮈는 그녀에게 프랑스 본토로 가자고 제안했으나 그녀는 온갖 습관이 배어 있는 그 집과 그 동네를 떠나 그녀에게 모든 것이 다 낯선 다른 동네로 이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결국 그녀는 1960년에 알제리에서 세상을 하직하는데, 동네에서 멀지 않은 브뤼 가 Boulevard Bru의 묘지(지금은 크리스천 묘지 Cimetière Chrétien로 이름이 바뀌었다)에 묻히게 된다.
이곳에서는 죽음과 관계된 것이면 무엇이나 다 우스꽝스럽고 추악하다. 종교도 없고 우상도 없는 이 국민은 군중 속에서 살다가 혼자서 죽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인 풍경을 마주 보고 있건만 브뤼 가의 묘지보다 더 살풍경한 장소를 나는 알지 못한다. (『결혼 · 여름』, <알제의 여름>, p.43)
이보다 더 살풍경한 장소를 알지 못한다고 카뮈가 평한 브뤼 가 묘지에 그의 어머니가 묻힌 이유는 카뮈가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유도 한 몫했을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일로 이 근처를 지나치는 적이 많았기에 한 번쯤 묘지 안을 들어가 보는 일은 쉬울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매번 이 곳을 찾을 때마다 묘지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잠시 후에 있을 친구와의 약속도 잊은 채 그 안에 들어갔다.
묘지 정면 모습입구에서 내가 두리번거리고 있자 묘지관리인이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찾으시는 분 있으세요?"
"네. 카뮈 어머니요."
"그분의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카트린 생테스 Catherine Hélène Sintès입니다. 1960년에 이 곳에 묻히셨어요."
그가 나를 입구 옆에 위치한 작은 건물로 데려갔다. 그는 1960년에 매장된 이들의 이름이 적힌 두꺼운 명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는데, 그와 나는 그 책에서 카뮈 어머니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 뒤 우리는 C(Camus)가 아닌 S(Sintès)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다.
연도별로 정리되어있는 명부. 오른쪽 액자에서 쓰여있듯이 예전 이름은 '브뤼 가 묘지'였다.
드디어 찾아낸 카뮈 어머니의 이름우리는 또 다른 관리인과 함께 묘지 하단부로 내려갔다. 가는 도중 멀리 지중해가 보였고, 묘지 주변은 잘린 나뭇가지, 낙엽 등으로 조금 어수선했다. 관리인의 설명에 의하면 몇십 년 동안 이 묘지는 관리가 되지 않았던 탓이라고 했다.
관리인의 안내로 경사를 내려가던 중 보이는 바다경사로를 다 내려가자 그들 중 한 명이 그녀의 묘를 알려주었다. 주변의 묘보다는 더 관리된 듯한 인상이었는데, 그의 말로는 얼마 전에 어느 미국인 저널리스트가 무덤 덮개 부분을 교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누군가 살펴주는 이가 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카뮈의 아버지 이름은 루시앙 카뮈(Lucien CAMUS)였고, 그의 어머니 이름은 카트린 생테스(Catherine SINTES)였다.
이 곳을 찾는데 큰 도움을 준 관리인 두 분. 카뮈 어머니 묘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을 찍었다.나는 묘지까지 안내해준 두 분께 사진을 찍어드렸더니, 활짝 웃으셨다. 다음에 이 곳에 다시 찾으면 그때는 먹을거리라도 싸들고 오겠다고 약속드렸다. 카뮈를 대신해서 그의 어머니 묘 앞에 꽃다발도 가져올 계획이니 다음에 올 때는 두 손이 가득할 것이다.
카뮈는 그의 어머니가 이 곳에 묻힐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동차 사고와 같은 의미 없는 죽음을 경계했던 그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도 그는 몰랐을 것. 카뮈의 삶만 해도 이렇게 온통 예측 불가능한 것들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