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내편이니?
” 니들~~ 내편이니? “
태석이 말한다.
친구들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는 듯 태석을 쏘아 본다.
술 한잔 걸치면 항상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된 말인 까닭이었다.
경태도 병철도 그리고 머리에 먹물이 들어간 승준과 성남도 묵묵부답이다.
”아 씨발~~ 니들~~ 내편이냐고~~“
태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순간 허름한 술집 안으로 정적이 흐른다.
태석은 억울 했다.
태어난 것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당했던 그 모든 것이 억울했다.
이젠 어딜 가도 막노동꾼의 찌질함을 감출 수 없는 상스러운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태석도 나름 똑똑하단 소릴 들으며 성장했다. 중학교 때는 선생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시절도 있었다. 때문에 태석의 억울함은 남다른 사연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한 자리에 모인 친구 누구도 그런 태석을 비난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태석의 넋두리가 귀찮았을 뿐이었다.
” 또 시작이네…. 새끼..“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판자촌은 무악재 고개 넘어 도심에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정착한 동네였다. 전쟁으로 갈 곳 없던 피난민들, 지방에서 올라와 딱히 집세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던 노동자들 그리고 과거를 알 수 없는 정말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가난이란 공통점 하나로 모여 살던 동네였다.
어른들 말로는 인왕산과 마주한 안산 언저리엔 화장장이 있었고 작은 공동묘지들이 몰려 있었다고 했다. 서울에서 사람이 죽거나 서대문 형무소에서(1) 시신이 나오면 사람들이 시체를 수레에 매달고 무악재 고개를 넘어 화장터로 향하던 상여 행렬이 끊이지 않던 곳이라 했다.(2)
그래서인지 화장터가 옮겨간 자리를 차지한 고은 국민학교엔 수많은 괴담들이 전해졌다. 비가 오던 어느 날 청소를 마치고 돌아가던 친구들이 소복을 입고 복도를 서성이던 귀신을 보았다는 소리부터 어느 여학생이 콩콩거리며 교실로 들어왔는데 발이 없었다는 등 괴담은 학교 역사만큼 길고 기구한 이야기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겁 많고 소심하지만 호기심 많고 궁금한 것도 많던 어린 아이들의 상상과 장소에 쌓인 역사적인 이야기들이 창출한 도시 괴담 같은 이야기 들이었다.
태석은 누이와 함께 살았다.
동네에서 술고래로 소문난 아비는 언제나 술에 찌들어 있었고 태석이 태어나 한번도 보지 못한 어미는 태석을 낳고 아비 친구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태석이 엄마라 부르던.. 술주정꾼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던 여인네는 태석이 태어나고 얼마 있지 않아 아비가 시골 어딘선가 쌀 몇 섬 떼어주고 데려온 후처였다. 계모는 비린내 나는 더러운 옷을 걸치고 유진상가 아래에 자리한 인왕시장 바닥에 가계를 구해 생선을 팔았다.
태석은 어른들의 소리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항상 맛있는 간식을 내 주었고 학교에서 필요한 학용품이며 책이며 육성회비조차 단 한 번 밀린 적이 없었다.(3) 때문에 친구들은 태석과 친하게 지내려 하였고 태석의 기억에도 학교는 참 좋은 곳이었다. 배변 봉투에 똥이 터져 나가라 담아가던 일도, 도시락 김치 반찬 국물이 뚝뚝 떨어져 책이며 학용품을 붉게 물들였어도, 온갖 신문지며 철이며 집에서 구경 조차 하지 못하던 폐품을 시시때때로 가져오게 하던 일들조차 태석의 기억엔 모두가 추억이었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었다.
중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서대문 시장 골목길을 끼고 자리하던 학교는 운동장 밑으로 학교 교실들이 숨겨져 있었다. 꿀벌을 상징으로 사용했던 학교엔 토끼가 뛰어다녔고 학생들은 작은 텃밭 일을 도와야 했다. 학교 재정이 좋지 않았던지 깨진 유리창은 며칠이고 방치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인근에 자리한 경기 국민학교엔 서울에서 꽤 잘살고 힘 좀 쓴다는 인사들의 자녀들이 다니던 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태석은 그런 학교가 자랑스러웠다. 학교에선 모범생이자 우등생이었고 반공 포스터며 글짓기, 사생 대회에서도 학교의 명예를 높이던 아이였다. 그런 태석을 선생들은 이뻐했다.
어느 날 집으로 형사들이 찾아왔다. 서대문 형사과에 근무한다던 형사들은 아버지를 양팔에 끼고 지프차에 구겨 넣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아버지의 정신이 맑아 보였다. 무언가를 예견이라도 하듯 아버지는 평소와 다르게 태석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소이 용공 분자로 몰린 아버지는 그렇게 홍제동 보안분실로(4) 끌려가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불리던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아버지의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5)
” 내가 말이지. 그날 그 일만 없었으면 지금 이렇게 살고 있겠니? 니들도 알지. 씨발 그 개 좃 같은 개 쒜기들이 나한테 뒤집어 쒸운거, 니들도 다 알거 아니야 씨~발~“
태석의 넉두리는 이어졌다.
사실 태석의 넋두리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 봐 내가 뭐라 그랬어, 마누라 도망가고 새색시 들일 때 부터 알아봤다니까?“
”아~ 그러게 맨날 술만 처먹는 위인이 일도 안 하면서 먹고 사는 꼴이 참 용하다 했다니까?“
”그러니까~~ 누군가 뒷돈을 대주고 있었던 게지“
”암~ 그러니 저렇게 탱자 탱자 살았지. 우린 그것도 모르고…. 쯧쯧“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그렇게 동네가 온통 떠들썩하게 태석의 가족에 대한 입방아가 올려지자 사람들의 수상한 시선이 가족을 난도질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네는 순식간에 빨갱이와 반공으로 양분되어 험악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은근히 태석 엄마의 미모와 경제적 능력을 부러워하던 동네 아저씨들과 아줌마들이 시기 어린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 니들 그거 아냐? 왜 요즘 젊은 놈들 중에 정치한다는 새끼를. 거 뭐 페미니스트인지 지랄인지 하며 끄떡하면 여자가 어떻고 남자가 어떻고 젊은 놈들 늙은 놈들 어쩌고 하는 그 쒜끼 말이야 “
” 아~ 그 이 뭐시기라 하던 애 말이야? 그 애 인기 좋던데? “
” 응~ 그 대선에 출마해 물 먹은 애? “
” 아 그 개혁인지 뭔지 한다던? “
” 갑자기 그 애긴 왜? “
승준과 성남이 갑자기 흥미롭다는 듯 태석을 응시한다.
” 나 솔까 그 새끼 참 좋아한 거 아냐? 교활한 놈이긴 해도 생각이 구닥다리 정치인들과는 참 많이 다르고 신선하다고 생각했었거든. 뭐 보수 키즈면 어떻고 거짓말 하면 어떻고 성생활 문란한거? 건 사생활이고 공자도 모르는데 뭐라 하겠어? “
친구들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드럼통에 대충 철판을 둘론 만든 술상을 두드렸다.
” 응. 공감 “
” 응. 나도 “
태석의 술주정에 가까운 넋두리를 귀찮아하던 친구들도 태석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 근데 그 새끼 하는 짓거리가 완전 쌩 양아치인 거 니들은 알았냐? “
” 표 얻겠다고. 아주 교묘하게 갈라치기를 한단 말이지….“
태석이 중얼거렸다.
순간 승준과 성남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 양~아치? 씩이나? “
승준이 되받아 쳤다.
사실 승준과 성남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아니 정치 보다는 힘과 권력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유독 내성적이었던 승준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심 공무원보다는 정치인을 꿈꾸고 있었다. 도서관을 찾아 하는 공부도 전공보다 시험공부에 치중하고 있었다. 선배들과 교수들 조차 학업 성적엔 별 관심이 없었다. 백분율로 분할된 점수였던 까닭이었다. 학교의 관심도 국가 고시에 쏠려 있었고 학교의 명예와 취업률에 영향을 주는 시험에 응시하는 학생들 지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성남 역시 언론을 전공하며 정치와 시사 문제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언론이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였다. 선배의 자조적인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차피 세상은 포장하기 나름 아니니?“
승준과 성남은 남에게 털어 놓지 못한 고민도 있었다. 대학에 진학하며 알게 된 현타였다. 당장 대학 등록금 걱정하던 자신들과 달리 부티 나고 잘생긴 친구들은 성격까지 밝고 맑았다. 말 그대로 신의 아들 딸들이었다.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여유가 넘치는 아이들과 서울 변두리 달동네 출신의 자신들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서로 다름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함께 공감하는 것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물과 기름은 태생부터가 다른 물질이었다. 한병에 담겼다고 서로 엉키고 섞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것은 저것이었고 이것은 이것일 뿐이었다. 그것이 세상이었다.
승준과 성남이 대학 생활에서 배운 것은 전공 지식도 학문에 대한 열정도 아니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어느 편에 설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태석도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나의 편이 아니면 적이 되는 사회를 경험했고 견뎌야 했다. 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리고 그 아버지를 비난하던 고향으로 여기던 동네에서 그리고 중학교 선생들의 돌변한 태도에서 그리고 막장까지 찾아오던 그 형사들의 사늘한 미소에서 그리고 이 좃 같은 사회에서 리더가 되고 싶어 외치던 그 어린 정치인의 영악함에서 조차….
정치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대중이 무식하다는 것을, 대중은 기억력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대중은 그냥 개 돼지란 것을 때문에 공산주의를 민주주의의 반대말인양 프레임을 짜고 이를 통치 수단으로 수십 년을 우려먹었다. 그영향은 아직도 보수의 가치니, 애국이니 하는 단어로 포장되어 있다. 공산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이 자본주의란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까닭에 기망술로 써 먹기엔 최고였다. 유식자들은 연구소와 학교에 묵어 두고 돈으로 길들이면 그만이었다. 아니 권력의 조력자로 활용하기에 그들보다 좋은 부류도 없었다.
공산주의는 생산 수단을 공동 소유로 하고 국가가 경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Capitalism(자본주의)의 생산 수단은 개인의 소유이고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통해 가격과 생산량이 결정된다. 더불어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독재주의 혹은 전체주의라 해야 한다. 민주주의 혹은 Liberal Democracy(자유민주주의)가 국민들의 주권과 다수결의 원칙을 핵심으로 하는 것과 달리 Dictatorship(독재주의)는 모든 권력을 한 개인이나 소수 집단이 장악하고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엄격하게 통제한다. 권력의 분립이란 있을 수 없다.
Totalitarianism(전체주의)역시 국가가 사회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고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극단적인 정치 체제이다. 즉 민주주의가 정치 체제를 이르는 말이라면 공산주의는 빨갱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체제를 이르는 말로 쓰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선 오랜 시간 서로 다른 가치를 나타내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란 단어가 Metaphor(은유)를 거치면서 변태 과정을 거쳤다. 사회를 갈라치고 선동하는 괴물이 된 것이다. 이러한 부등가 교환 현상은 조작된 생각에 신념을, 편협한 갈라치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계층 간, 지역 간, 성별 간, 갈등을 조장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고 소수 집단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비단 지배 계층의 전유물 만은 아니었다.
내집단(in-group)과 외집단(out-group)을 나누어 구성원을 배제하는 방식은 사람들에겐 이미 익숙한 생활이었다. 성별, 학연, 지연과 같은 비합리적인 기준으로 교육과 고용 그리고 승진을 결정하고 개인의 특성을 배제한 집단 특성을 평가하는 경향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이에 대해 정의롭지 않다거나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 삶의 방식이었던 까닭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에겐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다른 집단에 속한 상대방에겐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야 했다. 나의 집단에 대한 편애 증상이 집단화 경향을 보인 것이다. 이러한 내집단 편애(in-group favoritism)현상은 어찌 보면 인간의 본능적인 사회적 분류 메커니즘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정체성(Social identity) 혹은 사회적 범주화(Social categorization)는 내편과 네 편을 가르고 우월을 가르는 가치관으로 진화하며 우리 모두를 파괴의 구덩이로 몰고 있었다.
이젠 승준도 성남도 그리고 태석도 이러한 사회적 광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군가는 선택을 강요하고 살기 위한 선택은 이쪽 혹은 저쪽에 서는 것이 유일한 해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택의 댓가는 언제나 선택한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마치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전념하던 청년들이 2025년 어떤 이는 변절자로 그리고 또 어떤이는 권력자로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의 조력자로 각자의 삶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청년들이 늙은이가 되면 세상은 저절로 변할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의 아버지 세대들 보다는 좀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좀 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다. 세상은 좀 더 각박해 지고 좀 더 영악해지고 좀더 사악한 길로 가고 있을 뿐이다. 이제 선택은 승준 그리고 성남 그리고 태석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1). 1908년 반일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경성감옥으로 개소하며 1923년 서대문 형무소로 불렸다. 유관순, 안창호, 한용운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순국하거나 고초를 겪었다. 해방 후에는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으로 불리며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을 수감하였고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1988년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2). 서울 홍제동에 있었던 화장장은 벽제에 있던 '벽제승화원'의 전신인 홍제 화장장(火葬場)이다. 1912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령 제12호로 화장장 설치를 의무화하면서 같은 해 4월 1일 당시 경성부 홍제원 홍제동 246번지에 세워졌는데 이곳은 서울 최초의 근대식 화장장이었으며 1971년에 고양시 벽제동으로 이전했다.
3). 초등학교 이전 명칭인 초등학교는 의무교육 기관이었다. 때문에 입학금과 수업료는 없었으나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육성회비 같은 명목의 비용을 매달 납부했다. 1970년대 서울 지역 육성회비는 약 450원에서 600원이었으며 1997년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명칭 변경을 하면서 육성회비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4). 서대문구 홍제3동에 위치했던 소이 하얀 방은 경찰청 보안 수사 1,2,3대가 사용하던 곳으로 주택가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5,196평 넓이의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건물로 붉은 벽돌의 외장과 달리 내부는 온통 흰색 페인트로 칠하였고 민주화 운동 관련 고문 사건의 배경이 된 남영동 대공분실과 더불어 1980년대 인권 탄압의 상징적인 장소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5). 청량리 정신병원은 1945년에 개원한 대한민국 최초의 정신병원으로 2018년에 폐업했으며 화가 이중섭이 입원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