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소진 Jul 06. 2021

내가 말을 배우는 이유



“우리 반에 마틴이라는 애가 새로 왔어.”


친구가 별로 없는 아이에게 또래 친구의 이름을 듣는 것은 매우 신나는 일이다. 말수가 없어 친구가 생길까 걱정인 엄마는 얼마 전부터 새롭게 오기 시작했다는 마틴이라는 아이가 반가웠다. 마틴은 나의 아이처럼 이방인이라 이 나라의 말이 익숙하지 않아 특별한 언어 수업을 받는다. 조금 더 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학교 생활에 필요한 단어와 문장을 본인이 입학할 초등학교에서 직접 익히는 수업이다. 아직 유치원생인 나의 아이와 마틴, 그리고 서 너 명의 아이들은 매주 정해진 시간에 교문에서 선생님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이방인의 자녀이다. 혹은 부모 중 한 명은 독일인이 아니어야만 한다. 모국어가 현지어가 아닌 아이들. 그래서일까 대부분 고요해 보이는 입술과 터져나올 것 같은 마음을 꽁꽁 묶은 듯한 입술을 가졌다.   


폴란드에서  빅토리아는 눈두덩이가 유난히 움푹 들어갔다. 그래서 눈매가  어둡고 깊게 패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아들은 매일 머리가 짧았다. 아주 짧은 머리카락 때문에 아이의 눈동자가  또렷이 보였다. 엄마와 같은 눈매를 가졌다. 여러  빅토리아와 마틴을 보면서 어디서 많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역사 박물관마다 붙어 있는 사진 속에서 많이 봤다. 눈밑이 까맣고 송편을 빚어놓은    위로 움푹 패인 눈두덩이. 눈동자는 정면을 응시하고, 웃지 않는 웃음. 낯설지도 않고 그렇다고 익숙하지도 않은 우리의 표정.   


나는 이곳에    살았다고 이방인인 것을 잊고 있던 걸까.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는데 엄마의 손을 잡은 마틴과 빅토리아를 번갈아보며 다시 낯선 땅에 도착한  표정이 생각났다. 나는 얼마나 이방인이면서 이방인이 아니고자 했었을까. 이내 내게 영어로 이야기해달라는 빅토리아에게 미안해졌다. 혹시나 내게서 모멸과 무시를 느끼지 않았었기를. 이곳의 언어가 완전히 유창하지도 않으면서, 습관이 되어버렸다는 이유로 여전히 낯선 이방인에게 독일어로 말을 건네는 이방인인 내가 갑자기 우스워졌다. 자신을 배려하지 못한다고 그녀는 생각했을까? 내가 이곳에 처음 와서 느낀 표정을  앞의 그녀가 짓는다.   


나는 무시 받고 싶지 않아서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비웃는 내 발음이 싫었다. 어디든 나 같은 낯선 이는 지금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노력의 시간은 오래도록 지루했고 고단했다. 그 시간을 나를 그새 잊었을까? 그랬다면 나는 왜 잊었을까? 손짓으로 우물쭈물하던 엄마를 바라보던 마틴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고난을 잊는 속도는 그것을 극복하는 노력에 상관없이 진행된다. 이후의 찾아오는 감정이 덜 밑바닥이라 그럴까. 낯선 곳에서 낯설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대부분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했던 내가 이 나라에 살게 된 시간 동안 마주쳤던 수많은 시간을 복기한다. 내가 마주쳤던 눈동자에서 나는 어떤 마음을 읽었을까. 내가 그들의 눈동자에서 읽었던 모멸과 무안과 무시의 말은 결과적으로는 나를 자극하던 힘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빅토리아는 내게서 무엇을 느꼈을까. 이제 빅토리아는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할까? 마틴은 말없이 친구 사이에 끼어 웃는 방법을 먼저 배울까? 나와 내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삶을 타인의 방식으로 더하고 빼서, 결국 익숙하게 가꾸며 사는 방법을 배운 나는 부디 빅토리아와 마틴의 지금 삶이 조금 더 편해지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일상 소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