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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진 Jul 09. 2021

동그란 회전




찬물에 세수를 할 때 얼굴에 튀는 물방울은 마치 조각조각 나 각자의 세계로 흩어진다. 텁텁한 꿈의 장면 속에서 걸어 나와 손바닥에 고이다 흘러가는 물을 얼굴에 가져간다. 푸. 두 입술과 손바닥 속의 작은 파도가 마주치며 소리를 낸다. 눈꺼풀에 맺힌 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어젯밤 개어 놓은 작은 수건으로 아침 양치를 한다. 아침 세수가 얼마나 소중한 지 알게 된 것은 대부분의 지난날을 추억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내가 결혼을 한 나이 즈음, 나의 엄마는 그렇게 늙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과, 지원한 회사에 면접에 떨어져 취업하지 못하면 여기서 내 인생은 끝나는 것이라는 불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과 또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의 가장 큰 축복은 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생활의 리듬을 낯설게 찾아가면서 늘 오래되었다고 믿는 청년기의 취향의 고집을 풀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이런 고집을 아주 유연하게 회전시켰다. 매일 20킬로 이상을 탄다. 일 년 동안은 차 없이 살았다. 바구니가 터질 만큼 식료품을 담고 언덕을 오르고, 아이를 태우고, 또 자주 넘어지기도 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가족끼리 다 같이 한 줄로 서서 달리는 트래킹을 자주 하는데, 그때마다 이런 장면이 나중에 어떻게 떠올려질까 궁금해진다. 너도밤나무가 커다란 지붕을 만드는 숲의 초입에서는 온몸으로 초록 냄새가 훅, 하고 들어온다. 냄새 때문일까, 나무의 그늘 덕분일까, 감상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때에는 내 앞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힘차게 페달을 구르는 아이가 나만큼 어른처럼 느껴진다. 너도 나와 함께 자라고 있구나.



얇은 발목에 힘을 주고 자전거를 한번 구른다. 자전거에 매달아 놓은 야광 버클이 한 바퀴 돈다. 과일이니 고기니 냉동피자니 음식을 바구니에 싣고 달릴 때마다 나는 쳇바퀴 굴리기에 열심인 햄스터가 된다. 브레이크를 쥐고 설 때까지 자전거는 앞으로 간다. 자전거를 타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예전의 나의 모습을 가장 상쾌한 방법으로 복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내게 있던 습관이나 추억이 바퀴를 타고 속도를 내어 온다. 페달을 굴려 내야 하는 속도 때문에 언제나 잔상에 젖어있을 수가 없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마트에서 집을 올 때는 숲을 지나야 한다. 그때마다 두 뺨을 시원하게 감싸는 부드러운 바람이 냄새를 데려온다.



파란 하늘 아래를 꽉꽉 채우는 냄새가 있다. 너도밤나무에 맺히는 꽃 냄새. 언젠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부터 길어 올린 아득한 유년의 정경이 흘러가는 냄새. 초여름의 초록의 밀도 속에 가장 잘 어울리는 흰 꽃은 가을이 되면 먹지 못하는 먹지 못하는 밤을 열매 맺는다. 바람이 휙 지나가면, 사라락 빛이 연둣빛 잎 사이로 뚫고 나오고 밤꽃 냄새가 흩어진다. 이 냄새 속에 있으면 마치 지금이 정지된 시간인 듯, 아무것도 흘러가지 않는 듯 정지된 풍경 속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래서 나만 보이는 어떤 우물에서 무엇인가를 길어 올릴 수 있다. 유년과 청춘과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나를. 꿈이었던 것과 꿈이었을 수도 있을 아주 작고 쓸모 있었을 선택을 길어 올린다. 이런 마음을 여기에 데려오는 희고 따뜻한 여름의 냄새다.



흘러간 시간의 냄새를 달고 바퀴는 굴러간다. 바쁜 집안일을   자전거를  숲으로 들어갈 때면 내가 굴리는 자전거의 속도만큼 작은 바람 숨이 트인다. 그리고  속에 들어오는 냄새 안에서 유영한다. 그러나 계속 가야 한다. 나는 집이든, 슈퍼이든, 아이의 학교이든 목적지가 있다. 숲을 빠져나오면 밤꽃 냄새가 갑자기 사라진다. 달리는 중에 언제 냄새가 사라지는    없다. 그래서 그것은  끝나버린 작은 연인 같기도 하고, 돌이킬  없는 내뱉어진 문장 같다. 자전거는 계속 앞으로 간다. 내가 힘을  굴리는 만큼 빠르게 회전하고 나는  앞으로 나간다. 거기에는 많은 얼굴이 굴러가고, 꿈이 끼어있고, 선택했던 것과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 흩어진다. 굴러가다 다시 바퀴에 낀다. 다시 내게 돌아오기도 하고 작은 모래와 함께 튀어  속에 두고 온다.



숲을 빠져나오면 엄마가 가져오는 과자나 군것질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기다린다.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자전거 바퀴를 굴리면서 시간을 추억하는 동안 나는 나와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또 빠르게 사라지고 느리게 멈춘다. 내게 있던 간헐적인 청춘의 기억을 간간히 복기한다. 힘껏 언덕을 오르고 내리막을 천천히 달린다. 그것은 행복의 순환이기도 하고, 현재를 충분히 굴리는 구르기이다. 누구나 아름다운 시간을 갖는다. 누구보다 더 행복하고, 기쁜 것은 없다. 회복할 수 없는 슬픔과 치유할 수 없는 아픔이라는 말 보다 더 어울리는 것은 슬픔이 구르면 다른 것이 온다는 말이다. 아픔이 가면 무언가 오겠지. 그것이 바퀴에 끼일 아주 작은 돌멩이라도 새로운 무엇인가가 내게 올 것이다. 자전거가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바퀴는 계속해서 회전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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