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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진 Sep 11. 2020

벌써 온 어제, 여기 온 미래





 


아이는 포도가 익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정원의 포도 넝쿨 사이사이로 꽤 탄력 있어 보이는 열매가 맺혀있다. 언제가 되려나 싶던 까마득할 줄 알았던 순간도 밀물처럼 이미 쓸려간 모양이다. 물음이 피어오르고, 필요한 것들을 채우는 증거들이 살갗을 쓸고 태운 후 지나오는 가장 나종의 것들을 본다. 네 계절에 부는 바람과, 네 숲에 비칠 빛들, 그러니까 누군가 꽤 친절한 눈빛, 잊히지 않는 무엇인가를 어떻게든 용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 지금도 계속해서 열매가 될 거라는 꽤 괜찮은 기대 같은 것들을.


사물이 익어가는 배경은 누군가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누군가 그루터기에 앉아 잠시 쉬다 자기의 일부를 놓아두고 다녀간다면, 그것은 아마 그곳에서 자기만의 형태로, 어떤 방식으로든 뿌리를 내릴 거고, 훗날 또 다른 생명으로 번져갈 것이다. 진한 농도의 것에서 그 아래로 번져나가는 듯, 물들어가는 계절의 순리에 맞춰 주변에 스미고 열릴 또 다른 세계가 어느새 훌쩍 곁에 와 있다.

 

어찌 됐든,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예상이라는 것을 한다. 과거와 지금의 시간의 거대한 축을 관통하는 동안 벌어지던 각자의 태도에 반추하여 과연 무엇에 방점을 찍을 것일까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여기서 오는 우월감은 우연에 가득 찬 우리의 삶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은 늘 우연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정확히 예상할 수 없기에, 어떤 특별한 순간, 즉 특정한 개별적 감정이 발현되는 모든 순간에 개인은 이로부터 비롯될 일들에 대해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이가 길을 가다 그루터기에 앉아 잠시 쉬어 갈 때의 순간에 대한 은유와 비슷하다. 과연 무엇이 그에게서 새어 나와 어떻게 뿌리를 내릴 것인가? 그가 그곳에 앉아 사색했던 찰나의 순간이 훗날 그에게 어떤 미래를 선물할까? 와 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한 개인이 또 다른 개인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마치 그의 총체적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그 속에서 여러 결의 다양한 감정을 생산하고 공유하게 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때, 나는 개인의 세계에 깊게 관여하게 되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 문학이라고 여긴다. 인간 내면에는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근원적인 존재가 있다. 그 존재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감각할 수 있을까? 다른 이의 세계를 작품 혹은 거기에 투영된 삶에서 만날 수 있으며, 이것에 대한 경험으로 하여금, 나의 삶을 각자의 방식으로 반추할 수 있다. 삶을 더욱 윤기 있게, 혹은 풍성하게, 어떠한 배움의 역할의 바로미터를 세워 준다. 감정에 관한 점도 그렇다. 가끔 바닥을 치지 않도록, 우울에 관여한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다잡는 누군가의 마음가짐이 그와 비슷한 ‘오늘’에 처한 또 다른 누군가의 ‘미래’를 지켜줄 것이다. 어제의 시공간의 삶의 단면들 속 감정들이 오늘의 태도를 만들고, 오늘의 기록들이 미래의 세계를 상상하게 해 줄 것이다.


집 앞 산책길에 귀리 밭이 있다. 곡식이 여물어 제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나는 귀리가 익어가던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아주 예전에 귀리의 시작은 누군가의 그루터기에서 나왔을 것이고, 그것은 여물어진 계절에 대한 증거일 것이다. 이 계절의 한 허리에 올라 서 이렇게 일찌감치 곁에 와 있었으나 모르고 지나쳐버린 가장 나중의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도 모르게

벌써 여기에 와 있는 지금의 미래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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