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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진 Sep 15. 2020

일상 소묘

오늘의 발견, (괄호 넣기)



일상 소묘





 < 라임 나무 >





 향기의 소요가 길을 잃었다. 공기 속에서 부유하던 중, 갈 곳을 잃은 향기가 멈춰 선 자리가 있다. 그곳에서 나는 숨을 참고 너를 기다린다. 숨은 가슴으로 들어갈 뿐이다. 내뱉지 않는다. 숨이 몸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를 감싸고 있는 향기가 부서져 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반쪽뿐인 호흡 안에 가둔 향기가 빛 속을 떠돌며 경계를 만들어 준다. 경계가 없는 곳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온 냄새가 보이지 않는 금을 긋는다. 이제 공간이 만들어졌다. 여기, 향기를 맡는 숨이 가득 찼다. 호흡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향기의 길이 끝나는 곳부터 모여 있다. 그곳은 아주 소란스럽다. 소리는 바쁘다. 여럿의 세계에서 틈이 벌어지고, 그 사이를 메우기 위한 여럿의 목소리가 겹친다. 그러니까 이 말은 향기가 끝나는 곳에 일상이 살고 있다는 것, 향기가 끝나면 다시 소란스러워진다는 것, 그래서 그런 곳에서는 절대로 이 향기를 맡을 수 없다는 것.


 나의 걸음은 이 계절 동안, 늘 커다란 나무 아래 정지해있었다. 고개가 등에 닿을 만큼 깊게 뒤로 젖힌 후, 하늘을 올려다보아야만 나무의 커다란 몸집이 온전하게 눈으로 들어온다. 거대한 이파리는 숭고하게 하늘에 반해 땅을 덮는다. 걸음을 발끝에 무겁게 끌고 다니던 어느 날, 문득 하늘을 초록으로 꽉 채운 이 나무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름을 찾기 위해 한 계절 내내 나무 아래에 작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나무 아래에서 나는 정지했고, 나의 시간도 함께 멈췄다. 나는 무엇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숨이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나, 여기에 분명 가장 바쁜 호흡이 있다. 나무는 온몸으로 제 체취를 뿜었다. 밤꽃 향보다 더 경쾌하고, 아카시아 향보다는 진지하다. 우아하고 깊었다. 깊은 초록과 대지의 색이 오묘하게 섞인 듯한 색을 뿜는 냄새는 공기의 결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겹겹이 쌓인 나무의 밀도 높은 숨은 제 영역을 표시한다. 향기가 나의 숨을 덮고 가슴속으로 들어왔고, 그 향기를 맡는 순간, 이 계절 동안 내내 나무 밑 밖으로는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 다짐했다. 이내 향기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곤 숨이 끝날 때까지 기억하고 싶어 졌다. 그래서 이 긴 계절 동안 나무 밑에 앉아 코와 입을 벌렸다. 몸속 가득 향기가 들어와 보이지 않는 길을 통해 나의 몸을 온통 흐드러지게 감싸 안았다. 나의 본래의 숨이 지워져도 나는 행복했다.

나무로 향하는 길 위의 모든 공기는 아무런 냄새가 없으나, 나무와 가까워지는 어느 순간,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거리 위 일상은 그 어떤 향도 없으나, 나무 아래의 일상의 향은 찬란하게 아름답다. 나는 얼굴의 모든 구멍을 모두 벌리고 가슴을 움직여본다. 무성한 원시림을 담은 냄새를 열심히 몸 안 가득히 모으고 뱉는다. 호흡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 그러다 경계 밖의 삶의 냄새와 마주한다. 깊고 찬란한 향기가 일상의 공기와 겹치는 순간, 종 모양의 거대한 유리 덮개를 생각해냈다.


 덮개 속은 마치 진공상태 같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는, 그러니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나무의 향기가 부유하는 공간에는 냄새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의 수많은 가지와 그것들을 덮은 잎들은 일종의 덮개처럼 보일 뿐이다. 이때 그것들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매우 특별한 존재를 위해 다른 세계와 분리해 주는 일종의 경계가 된다. 유리 덮개 속 세계에 스민 향기가 정지된 채 춤을 춘다. 움직이는 것은 전혀 없지만, 이 속에 분명히 살아 있는 향기는 조용한 춤을 추고 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분명히 있다. 보이지 않는 향기 이외에는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공으로 들어간다

코, 입, 귀, 눈을 모두 열어 놓고

이 계절의 향기를 천천히 마신다.

이 향기가 끝나는 곳으로 돌아가기 싫다

늘 있었던 곳처럼 분주하고, 어려우므로. 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이곳에서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고요 속으로 가라앉는 중에도


그러나 나는 가장 깊디깊은 숨을 쉬는 중이고

가장 분주하고 어려운 일을 하는 중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곳에서,  

그 무엇도 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이는 일을


늘 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필요 없어 보이는 일 같을지라도.



 냄새가 끝나는 곳에서 나무의 숨도 끝난다. 그곳은 향기가 끝나는 곳이다.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으면 향기는 사라지고 없다. 그 자리에도 바람은 불지만, 그 어떤 냄새도 품고 있지 않다. 그 자리에도 나무는 있지만 어떤 체취도 뿜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가장 분주하고, 가장 바쁜 우리 모두의 일상이 있을 뿐이다. 원시림 속에서 온몸에 나무의 숨을 겹겹이 묻히다가 숲 밖으로 나왔다. 이 향기가 사라지지 말라고 주술처럼 홀로 말했다. 내 곁에 계속해서 있었으면 했다. 그렇게 시간을 달리다가 계절의 끝에 이르렀다.


 온 계절 동안 아름다운 향을 뿜는 이 나무의 이름이 궁금했었다. 그러나 누구도 나에게 그것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나무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이곳에서 더 이상의 향기를 맡을 수는 없었다. 어떤 누구도 내게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어떻게든 알게 되었다. 애쓰지 않고 그저 향기를 맡았을 뿐이었는데, 간절히 알고 싶어 하던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때, 내가 사랑했던 이 계절은 끝났고, 다른 계절의 걸음이 다가왔다. 그렇게 이 계절의 향기는 끝이 났다.


 낙엽이 내린다. 다시 나무에게로 갔다. 나무 위의 유리 덮개는 없었다. 지난 계절, 이곳을 가득 채운 향기 대신, 낙엽이 바람에 빗댄 소리를 내며 땅으로 내려앉았다. 향기는 어디에도 없다. 입을 벌리고 나무의 숨을 더듬었지만 벌써 다른 일상이다. 나무는 이미 제 향기를 잊은 듯하다. 향기는 사라졌다. 유리 덮개도 사라졌다. 한 계절 동안 사랑했던 나무는 이 계절 속에서 제 몸의 향기를 잊었다. 다만 제 몸을 멀리 보내기 위해 새로운 잎의 왈츠를 추기 시작할 뿐.



   아무것도 없지만,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의미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었지만 


   언제나 거기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이 산문은 2018년 8월 에어 서울 기내지 <Your Seoul>, 이 달의 문학작가로 선정되어 잡지에 소개된 글입니다. 브런치에도 함께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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