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연재
우리들의 우연이 공전할 때
나도 너만큼 반짝거리니까
내 주변에도 내 둘레를 도는 누군가가 있을까
1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날 일들
첫 번째 공전
하룻밤 만에 계절이 바뀌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는 일도 드물어졌다. 눈 같은 얼음이 필요한 공기다. 이틀 전에는 어떤 이의 얼굴을 때리고 갔을 법한 아픈 바람이 불었다. 어제는 두꺼워진 공기 위로 뜬 봄날의 초승달 냄새가 났고, 오늘은 온통 밖에서 한여름의 초록을 품은 라임 향이 불어온다. 사흘 동안 식탁 앞으로 나 있는 창문을 연다. 창 안의 장면은 일상이다. 그러나 창 뒤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풍경은 모두 색다르다. 장면들이 데려오는 기억들을 목격하는 일 역시도 같은 게 하나 없다.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더듬는 일은 마치 주름 접힌 커튼을 조금씩 펴보는 것과 비슷하다. 커튼의 첫 겹을 들춰보면 그 속에 담긴 어떤 장면들이 주름의 안쪽에서 튀어나온다. 손가락 끝을 움직이는 아주 잠깐의 순간 동안 기억들이 스치는 길을 열어준다. 이내 그 잔상의 먼지들이 손 등 위로 내려앉는다.
거기에는 표적이 서려 있다. 창을 닫기 위해 손끝을 다시 커튼에 가져가 댄다. 피부와 주름이 닿는다. 그 끝에 상이 맺힌다. 커튼의 주름마다 서린 기억이 있다. 내가 지나던 길, 살던 집, 즐겨 찾던 카페들이 있고, 만나고 헤어지던 사람들에게서 받은 잔상과 상처와 사랑이었던 이야기들도 있다. 주름과 주름 사이, 그리고 또다시 이어진 주름 뒤에서 요즘의 이야기들도 일렁인다. 그리고 또 다른 주름 안쪽에도 미래에 걷게 될 길과 집과 카페들과 사람들이 따뜻한 상상을 품고 있고, 만나게 될 이야기들도 주름 속 작은 먼지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다. 커튼 자락 사이에 머문 바람이 불 때마다 기억이 춤을 춘다.
주름이 겹친다. 겹쳐지는 순간, 일렁이는 기억도 겹친다. 기억의 풍광이 서로 끼어드는 탓에 서로 다른 시공간의 풍경들이 안에서 밖으로 새어 들어온다. 이쪽 주름이 저쪽 주름에 닿는 순간, 기억 속에 예쁘게 품고 있던 지난 시공간과 시공간이 겹쳐진다. 서로 다른 풍경들이 안에서 밖으로 새어 나가고, 서로 겹친다. 하나의 주름이 다른 주름과 겹쳐질 때, 내게 머물렀던 시간과 공간은 서로 이어지고 서로 나뉘어 떨어지고 곧 다시 이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시공간의 여러 모양의 기억들로 어떤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도 되살아난다. 나를 품고 있던 시공간에서 나와 관계를 맺은 모든 이름이 아슬아슬하게 튀어나온다.
그 순간, 갑자기, 창문 밖의 풍경이 궁금해졌다. 올리브색 리넨 커튼 속으로 들어간다. 유리창과 커튼 사이에 작은 미궁이 있다. 거기는 일상 사이를 열고 만든 비밀스러운 공간인데, 커튼의 안쪽으로 들어 갈 때마다 이 작은 세계는 계속해서 열리고 닫힌다. 숨을 쉴 때마다 커튼이 날린다. 커튼 아래의 비밀스러운 세상은 금세 호흡으로 가득 차 버린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작은 세계가 춤을 췄고, 그래서 주름이 생겼다. 그럴 때 마다 세계를 가득 채운 시공간들이 살짝 닫힌 미궁 속에서 반짝이며 튀어나온다. 빛의 실루엣이 떠다니는 먼지 위로 일렁이자 금세 이곳의 공기도 탁해진다. 다시 창문을 연다. 밖의 공기는 제법 명랑하다. 허공 위로 맺힌 상 너머 아지랑이가 어른거린다. 오랜만에 하늘이 맑다. 외출이 필요해졌다.
하루에 1부 올립니다. 내일 계속됩니다.
2016년에 출판된 자정작용에 실린 제 단편 소설 <우리들의 우연이 공전할 때> 를 다시 한 번 옮겨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