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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진 Nov 05. 2020

우리들의 우연이 공전할 때 3

단편소설 연재 



3



 

두 번째 공전 





-이 정도면 나는 됐어, 나는 그동안 잘해냈잖아, 안 그래

 - …

-이봐, 너 왜 말이 없어

- …

 내게로 향하는 위안의 감정과 용기의 행동이 교차하는 시점이 있다.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없이 어떤 시도를 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언제나 돌발적이고, 갑작스러운 것들인데 그 중 가장 용기있던 것은 이랬다. 


 퇴근 후 들른 카페에서 <Volare> *가 흘렀다. 이 선율은 늘 나를 여행시켜준다. 내가 늘 앉는 그 자리에 오늘은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앉아있었고, 그 사람이 하필이면 폴로 향이 날 것만 같은 남자였는데, 그 향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남자의 향기였고, 또 하필이면 그가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있었다. 그런 순간의 장면을 하필이면 오늘 본 순간이었다. SNS에서 우디 앨런의 영화 <midnight in Paris>의 편집 영상을 보는 순간, 오, 그것을 보는 순간! 어디론가 떠날 비행기 티켓을 사버려야겠다고 결정했다. 


 우리는 모두 늘 마음에 품고 있는 기대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어느 날, 그것을 세상 밖으로 내비쳤을 때, 

일상을 뒤로하는 어떤 시공간을 꿈꾸게 된다. 어쨌든, 떠날 거야. 원래 여행은 이래야 제맛이니까. 스페인으로 가고 싶어. 열흘 동안의 휴가 한낮의 태양 아래 피에스타를 할 거야. 체리와 자몽을 넣어 오랫동안 정성 들여 절인 복숭앗빛 상그리아를 한 잔 마시고 갓 구운 콘 추로스에 초콜릿을 찍어 먹어야지. 손에 묻은 설탕 가루는 닦지 않고 빨아먹겠어. 모차르트 피날레티 맛의 아이스크림도 먹을 거야. 오래된 잿빛 벽돌 건물 벽에 짐을 푼 바이올린 리스트의 탱고 음악에 맞춰 맨발에 플라멩코를 출지도 몰라. 때마침 나는 발목까지 오는 긴 붉은색의 폴스커트를 입었고, 펄럭이는 치맛자락이 허벅지 위로 올라가도 상관없지. 모두 꿈 같게. 


 제일 싼 항공권이다.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야 바르셀로나에 닿는다. 중국, 청도와 베를린에 들른다. 청도에서 두 시간을 기다리고, 베를린에서는 네 시간의 여유 시간이 있다. 공항에서 나와 베를린 장벽에 가 보기로 한다. 나는 서둘렀다. 베를린은 여름이어도 서늘했다. 시내로 나가는 트램을 탔다. 트램 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도 꽤 즐겁다. 대부분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들은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칼 슈미트, 위르겐 하버마스, 카를 마르크스, 에른스트 카시러, 게오르그 짐멜 같은 독일 철학자들의 이름을 떠올려본다. 혹은 독일의 건축사라든지 아니면 리히텐슈타인의 삽화가 들어간 수필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의 우리 모두는 적어도 한 정거장 정도의 시공간을 공유하는 중이다. 누군가를 눈에 담으려하면 트램에서 내렸다. 나는 남았다. 


 이십 분 이상이 지나고서야 목적지의 반대 방향으로 탔음을 알게 되었다. 급히 내렸다. 프리드리히 거리 역이었다. 사람들이 꽤 모여 있는 역인 것으로 보아 이곳도 베를린의 유명한 곳 중 하나이거니 싶어 장벽 대신에 이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잘못 탄 트램으로 목적지가 갑자기 바뀌었다. 플랫폼의 벽에 붙은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 이곳은 눈물의 궁전**입니다. 프리드리히 역은 분단 시절, 서독 지역에서부터 동독 영토를 관통하여 베를린까지 다니던 열차가 정차했던 기차역으로 동서 간의 왕래가 가능했던 관문이었다


 동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서독으로 갈 수 있었다. 한 여름에도 입김이 나왔을 것 같다. 서리고 시린 검문소가 생겼다. 검문은 삼엄했다. 그렇게 프리드리히 역은 다른 세계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사랑을 하기 위해 거쳐야했던 곳, 그리운 이를 만나기 위해 지나가다 죽음을 맞았던 곳, 항상 슬픔이 묻어 있는 사람들의 보폭들의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던 희망이 까마득했던 곳. 기억에서 지우지도 못할 까마득히 어두웠던 검문소를 훗날 독일 통일 후 눈물의 궁전이라 이름 붙였다. 


 지난 시간 속을 들여다본다. 어떤 보통의 날에 갑자기 이별을 준비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 부유하던 슬픔과 그리움이 섞여 있던 검은 공기를 훑어본다. 슬픔이 넘쳐흘러 눈물이 된 벽에서 흘러나오는 예전의 이야기들을 듣는다. 귀를 대본다. 관람객들의 소음 사이로 내게 어떤 말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상관없다. 그것이 느낌일 뿐일지라도. 


 부드러운 햇살이 그리워졌다. 밖으로 나간다. 프리드리히 역 앞으로 펼쳐진 큰 광장으로 걸어 나왔다. 시계탑의 짧은 그림자가 노천카페에 드리운다. 연둣빛 색으로 거칠게 페인트칠 된 테이블이 연결된 나무 벤치에 앉았다. 맥주 한 잔을 마신다. 하얀 거품 사이로 입술의 갈증이 덮인다. 잔과 나 사이에 시간의 권태들이 주름져 입속으로 스민다. 주름 사이로 기억의 시공간이 춤을 추며 어디론가 날아간다. 



<3부 계속>
          






 Volare *


도메니코 모두우뇨(Domenico Modugno)가 작곡한 이탈리아 칸초네로서, 작사는 프란체스코 말리아치(Francesco Migliacci) 이다.  <Volare>의 가사는 이렇다 


때로는 세계가 고뇌와 눈물의 골짜기로 들어가 버리는 수도 있지요. 볼라레(날아갑시다). 오, 노래해요, 고민을 버리고 구름 속으로 날아갑시다. 나의 행복한 마음은 노래해요. 당신의 사랑이 날개를 내게 주었기 때문이지요




눈물의 궁전 **


눈물의 궁전 :  Tränenpalast, 동서 베를린의 경계에 있던 프리드리히 슈트라세 역의 출국대합실. 현재는 <Grenz Erfahrungen, Alltag der deutschen Teilung> 이라는 주제의 상설 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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