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연재
4
*
세 번째 공전
*
귓가에 늘 듣던 노래가 맴돈다.
그대는 내게 끝없는 이야기, 그대는 내게 끝없는 이유
이야기는 끝이 없다는데, 나의 경우는 아니었다. 그대와 나 사이의 이야기와 서툴고 어렸던 이유들은 어느 날 갑자기 상실의 끝에 닿았다. 당황해서 무안해진 얼굴과 발걸음을 달래기 위해 언젠가부터 우리가 공유했던 공간들을 찾아가 홀로 누웠고, 얼굴을 바닥에 비볐다. 그리하였어도 절대로 돌릴 수 없는 시간이 미워져 슬퍼졌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좋아했던 노래를 계속해서 듣는 것으로 나마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위안하기로 했다. 반복해서 듣다 보면 그 순간에 내가 침잠되어 잠긴다. 마치 예전의 우리인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네가 계속해서 귀에 속삭이는 이야기 같아 모든 순간이 먹먹하다.
그 언제였던 우리들의 모든 시공간이 달팽이관을 따라 가슴으로 기어간다. 나의 귀는 매일매일, 매 순간 매 순간, 현재에서 과거까지의 이야기들의 노크 소리를 듣는다. 불청객의 방문은 어떠한 질서도 없다. 마치 아무 약속 없는 날, 집에서 늘어진 잠옷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더는 이야기될 수 없는 우리들의 시공간이 자꾸만 나 혼자 남은 방에 불쑥불쑥 들어와 어지럽힌다. 연극이 끝난 후 막이 내리고 박수를 보낸다. 끝이 아쉬워 괜찮았던 배우들을 딱 한 번 정도는 다시 보고 싶은 아쉬움에 커튼이 열렸으면 하는 기대를 한 적이 있다. 단숨에 읽어버린 소설의 끝에 에필로그가 몇 장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 적도 있다. 분명 그것은, 끝이 오기를 바라지 않는 이유에서 끝을 놓아주지 않으려 애쓰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내게 그대는 끝이 있는 이야기였고, 끝이 있는 이유였기 때문에 우리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끝이 아니기 위해서는 시작과 끝이 이어져 있어 끝을 맺었어도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여러 번의 시작과 끝이 반복되면 시작점과 끝점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야기든, 감정이든, 관계든 모든 것이 끝이 아니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와, 감정과 관계들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그러나 만날 수 없다. 결국, 지금의 나는, 우리들의 세계가 끝나는 절벽 끝에 매달려 있다. 그러니 여기서 그만둔다.
집에 오는 길에 작약을 샀다. 꽃집 앞에 진열된 작약 다발은 다섯 송이씩 포장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꽃잎이 활짝 피었다. 수일 동안 팔리지 않았든지, 갑자기 날씨가 따뜻해져서 그랬는지, 꽃은 조금 일찍 생(生)을 터트렸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가게 여주인이 새로운 작약 다발을 들고 나왔다. 모두 봉우리였다. 시간을 품은 채로 생(生)을 준비하고 있다. 입을 꽉 다물고, 하고 싶은 말들을 한 번에 터트리기 위해 꾹꾹 참고 있는 것 같다. 다섯 개 봉우리가 담고 있을 것 같은 시작과 끝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끝나버린 우리의 세계의 시공간에서 조금이라도 탈출하고 싶었다. 언제쯤 절벽을 아주 조금 깎아, 쏟아지는 자갈들로 새로운 길을 만들 수나 있을 것인지. 봉우리의 끝은 어떤 모양일지. 과연 어떤 미래를 품고 있었을지.
갑자기 더워져 버린 오늘의 공기에 꽃잎은 제 가슴을 조금씩 열었다. 숨을 쉴 때마다 꽃의 미궁이 열리는 듯이, 닫힌 사원의 문을 두드린다. 제 긴장을 자유롭게 들켜도 좋다 한다. 작약의 봉우리에 손을 대어 보기가 눈부시다. 햇살 한 줌에 따뜻한 색이 환한 빛을 만들어 방 안 가득 번진다. 향기를 타고 은근하고 따뜻한 상상이 불어온다. 며칠 후, 꽃은 자줏빛 꽃잎을 활짝 열었다. 너무나 길고 노란 수술들이 어지럽고 빽빽이 솟아나 있었다. 갑자기 무서워졌고, 그 순간 이내 슬퍼졌다. 터트린 꽃망울 속에 치부의 눈(目)이 들어있는 듯했다. 작약이 품고 있던 생의 끝이 여전히 눈부시기 위해서는 봉우리 속의 모든 것들도 아름다운 상상을 계속할 수 있어야 했다. 온전하고 화려한 개화는 갑작스러운 결말을 맞았다. 꽃의 생은 끝났다. 이제 이 꽃이 싫어져 버렸다.
-5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