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분절되는 순간을 자주 겪었다. 말은 곡선처럼 서로의 사이에서 부드럽게 닿고 흘러야 아름답지만, 내게 닫기만 하면 언제나 굴절되었다. 많은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가끔 대답하는 방법을 잊었다. 문자가 지닌 음소를 정확하게 발음하기보다 몸으로 더 많이 반응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눈가의 주름의 모양과 손짓의 방향이 어줍지 않은 문장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자주 옹알이를 하는 꼬마처럼 굴었다. 낯선 언어를 하루빨리 익혀야 했다. 사람들의 문장은 내게 닿고 자주 굴절되었다. 이방인으로서 이 나라의 말을 모르니 내 생각을 전하기도 힘들었고, 눈치 고수가 되었으니까. 나도 당신들처럼 이곳에 사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는 이곳에서 결코 고요한 거품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매번 짜고 쓰린 목소리가 목젖까지 올라왔다가 쓸려 내려간다.
낯선 곳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일은 생존권에 대한 투쟁이다. 어떤 나라든 국민 대다수가 사용하는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존재의 근거가 된다. 독일에 온 첫 주, 독일어를 몰랐으니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사용했다. “당신, 여기는 독일이야, 그러니까 독일어로 말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쏘아대던 관공서 직원에게 나는 미안하다고, 머리를 숙이는 것 말고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미안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그때의 나는 얼마나 머리를 굽혔었는지. 창피함과 억울함으로 시작된 이 낯선 땅에서의 삶이 나와 내 가족에게 생채기를 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미안합니다. 당신 나라의 말을 배울게요,라고 속으로 말하고 씁쓸하게 뒷걸음질 쳤다.
사람들은 아주 무례했다. 그들의 눈빛에서 나는 그림자를 숨겼다. 억울함과 열등감을 섞은 분노를 침샘까지 꾹꾹 눌렀다. 그럴 때마다 젊은 시절, 러시아에서 시작한 이방인 생활을 복기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넵스키 거리를 관통하는 다리를 걸을 때,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내 뺨을 후려치고 손가락 욕을 퍼부으며 도망갔다. 마음이 절벽 끝에 닿았다. 까만 밤에도 내 붉어진 얼굴이 선명했다.
아무 잘못이 없는데 뺨을 맞는 것처럼 억울한 일은 없다. 낯선 타국에서는 그와 비슷한 일이 너무나 잦았다. 어떻게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아이에게 당부했다. 이유 없이 무시받지 말자. 네가 이곳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너도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줄 알아야 해, 나는 이 말을 하면서 얼마나 내 그림자를 감췄을까. 얼마나 머리를 더 굽혔을까?
아시아인 외모만으로도 무시를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상한 동물 소리를 내며 내 곁을 지나가던 어린이들과 내게 코로나라고 오지 말라며 십자가를 그어대던 또 다른 청년들도 있었다. 아이의 학교 학부모 회의에서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누군가 웃으면 따라 웃었다. 무시와 무례가 길어 올리는 우울함의 파도가 나를 집어삼키는 날에는 한동안 수면 위로 쉬이 나오지도 못했다. 가장 처음 공부한 독일어 단어는 ‘인종차별’이었을 정도였으니까. 무조건 나는 현지 언어로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없지만, 외딴섬처럼 고립된 흰 안개 속을 걷는 것 같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독일어를 공부했다. 길에서는 먼저 인사했다. 한 문장이라도 더 목소리를 냈다.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용기, 내 아이를 놀리는 손짓에 대한 질타. 시간이 지나며 말할 수 있는 단어가 늘어나고 있다. 현지인처럼 목소리도 꺾어보고, 리액션도 섞어가며 단어를 뱉어 본다. 문장에 힘이 생기자 억울한 사건은 많이 줄어들었고, 대신 용기가 그 자리에 생겼다. 하고픈 말을 할 수 있는 힘은 생각보다 더 많은 자신감을 가져다주었고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소외감도 사라진다. 언어가 가진 묵직한 밀도의 가치는 삶을 더욱더 당당하게 유지함을 믿는다. 요즘 나의 언어는 부드럽게 상대에 닿는다. 이것은 더 이상 짜고 쓰린 목소리가 아닌, 용기의 증명이다. 그리고 절대로 고요한 거품처럼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예스 24 나도 에세이스트 가작으로 뽑힌 원고입니다.
내가 모국 이외의 국가에서 거주 등록을 하고 정식으로 일 년 이상을 살아온 경우를 말하자면, 러시아, 우크라이나, 미국, 독일에서의 생활이다. 결코 가볍게 말할 수 없는 삶의 장면 덕분에 나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해외에서의 삶은 단지 공간이 주는 간극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느낄 수 있는 공통의 감정에 대한 마음이다. 그러니까 국경과 상관없이 삶은 엇비슷하다고.
수필은 개인의 삶의 모양을 일상과 가까운 솔직한 문장으로 빚어내는 장르라 이곳에서 점등되는 마음과 일이 얼마나 많은 공감을 일으킬까 싶었다. 해외에서의 삶이 시공간을 극복해서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공통으로 공유하는지. 그래서 한번 예스24에 내봤는데 가작으로 뽑혔다.
내 삶에서 언어가 분절되고 해체되는 순간의 마음과 무너지던 시간, 그리고 극복하는 과정의 글, 그리고 의미있는 결과가 좋았다. 뽑혔다는 사실보다, 나를 다독여주는 마음이라 기분이 좋다. 매경에 발표하는 에세이는 칼럼 형식으로 적정 정보를 담아야해서 완전한 수필의 성격을 띄지 않지만, 이번 <거품이 되지 않을 용기>는 에세이로써 더 유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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