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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진 Mar 07. 2022

빛만큼 맑던 우크라이나




첫 직장 생활을 우크라이나에서 했다. 그때의 나는 20대 중반이어서 겁이 없었고, 낯선 것도 항상 좋아했던 것 같다. 언론고시를 하겠다며 어렵사리 됐던 (곧 때려치우려겠다 싶던) 모 일간지 기자 수습 기간 중에, 여러 곳을 지원했는데 어느 날 헤드헌터로부터 합격 전화가 왔다. 그리고 나는 우크라이나로 갔다.


우크라이나에는 빛처럼 눈부신 밤이 있었다. 밤에도 도시 곳곳에 있는 성당의 돔이 마음속 가장 깊은 곳도 비췄다. 러시아에서의 경험보다 사람들은 더 소박했고 친절했으며, 좋은 친구들과 동료도 만났다. 수도 키예프 한복판에 살았었는데 15년이 흘러도 저 흐레샤칙 거리에 있는 상점, 정아랑 퇴근하고 자주 가던 음식점, 카페 아로마, 그 나이에 여자 넷 호텔 주말 브런치도 호사였고, 도시 중심의 소피아 성당도 빛이었다. 그중, 내가 가장 사랑했던 유난히도 푸르던 에메랄드 빛 안드레이성당 앞의 눈 덮인 언덕과 내 아파트에서 바라보던 키예프의 분홍 노을은 지금도 내 곁에 있다.



크림반도에는 체홉이 사랑한 얄타해변이 있다. 그 유명한 얄타회담이 열린 곳, 덜컹거리는 2층 침대칸 밤 열차를 타는 일, 벼랑 위 위태롭게 아름다웠던 제비둥지 성. 양귀비 씨를 가득 넣은 빵을 파는 소년. 뉴스에 자주 나오는 키예프 광장 지하 상점 사이에 앉아 꽃을 팔던 노인의 주름. 빈부격차도 상상 초월인 곳. 푸틴이 러시아의 일부라 우겨대는 동슬라브의 기원을 품은 땅. 키예프 루시로부터 시작했던 역사의 처음.


우크라이나 밖에서 우리는 이 전쟁에 맞닿은 사람들을 얼마나 가늠할 수 있을까.


“엄마, 아드리 엄마가 비행기가 없어서 못 온대.”


독일에도 우크라이나가 고향인 사람이 많이 산다.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 딸의 친한 친구들 중 한 아이의 부모의 고향. 불안한 위기 속에 하필이면 아이의 할아버지가 사망했다. 아이 엄마는 우크라이나로 잠깐 들어간 사이, 위기는 고조되었고 비행기 편이 없어 가까스로 육로를 통해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고 한다. 꼬박 한 달 만이다.


그 친구에게 조문 카드를 보내며 말미에 이렇게 썼다. 너의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내가 머물던 키예프의 모든 장면을 생각하는 것, 생각하는 순간에도 걱정이 앞서는 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야생성만 드러낼 뿐. 가장 고통받는 것은 그곳이 여전히 삶의 터전인 자신들의 땅에 남겨진, 혹은 남을 평범한 사람들이다.




#박소진시인 #우크라이나 #전쟁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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