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소진 Sep 10. 2021

외로운 시대에 서로가 다행일 사람들

기부, 마음을 마주하는 공동의 연대





꽃을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는 들판이 주변에 많이 있다. 그곳에는 계절에 맞춰 피는 제철 꽃들이 가득 피어있다. 요즘은 키 큰 해바라기가 한창이다. “꺾어 갈 수 있는 꽃밭” 정도로 번역되는 나무 간판이 꽂힌 들판에서 꽃을 구경하다 보면, 스스로 자라고 있는 들꽃보다 계절에 맞춰 씨를 뿌려 꽃을 가꾸어 놓은 사람의 손길이 분명히 보인다. 그런데 이곳을 지키는 사람은 없다. 분명히 꽃을 구하러 오는 사람은 있는데 그들로부터 돈을 받는 사람은 없다. 대신 허수아비가 서 있고, 검은 까마귀 몇 쌍이 그 자리를 찾다 떠나가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낡은 나무 선반 위에 작은 그릇이 있을 뿐이다. “꽃은 원하는 만큼 가져가세요. 대신에 원하는 만큼 놓고 가세요. 환우를 위해 쓰입니다.”


해바라기를 원하는 만큼 가져가세요. 그리고 원하는 만큼 기부해주세요. 아픈 아이들을 위해 일을 하는 재단에 기부됩니다.


기부의 문화는 독일 일상에 미덕 이상으로 자리 잡힌 삶의 태도이다. 독일 생활을 시작했을 때 가는 장소마다 보이던 단어, 우리말로 ‘기부하다’라고 번역되는 독일어 단어, “spenden”이 쓰여있는 작은 팻말과 저금통이 처음에 과연 무엇일까 싶었다. 작은 돼지 저금통에 알록달록 색깔 펜으로 쓴 ‘기부’라는 단어의 무게는 결코 중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눔, 공유, 배려라는 단어로 대체될 수 있는 상황에서 쓰이는 단어처럼 느껴진다. 독일에 살면서 가장 놀라워하는 문화 중 하나가 기부라는 행위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이것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건네는 행위를 넘어   일상의 익숙한 장소에서 보통의 우리가 습관처럼 여기는 마음의 손짓을 닮았다.


독일에는 어린이, 청소년, 노년층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복지재단이 많다. 이곳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은 대부분 무료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른들로부터 자율적인 기부를 기분 좋게 요구한다. 아이들의 행복한 성장을 모토로 하는 사회복지 재단 ‘Abenteuer Spielplatz’은 코로나 규칙을 지키며 여름 내내 시민의 곁에 있었다. 번지점프, 트램펄린 등 여러 기구가 마련되고 다양하고 풍성한 아트 프로그램이 두 달 동안 펼쳐졌는데, 놀라웠던 것은 모든 것이 무료라는 것이다. 입구에 작은 저금통이 하나 있을 뿐이다.


사진 : 여름 내내 프랑크푸르트 마인강변에 설치된 ‘Abenteuer Spielplatz’


비단 페스티벌에서만 공동의 저금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일상의 시공간에서 기부 문화는 자연스럽다. 미술관에서도, 초등학교 입학식에서도, 음악회에도, 하물며 코로나 테스트 부스에도 함께하는 사람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모인다. 마스크를 쓴 돼지 저금통 안에는 무료 코로나 테스트를 한 사람들이 넣고 가는 동전과 지폐가 쌓여간다. 나 역시 얼마 전 기부에 대한 인상적인 경험을 했다. 초등학교 입학식에서의 일이다. 교장 선생님이 마지막 기부를 독려하며, 저금통을 들고 부모들에게로 왔다. 테이블을 돌며 얼굴을 마주하고 짧은 덕담을 나누며 부모는 기분 좋게 지원하고 싶은 만큼의 금액을 저금통에 넣었다. 물과 비스킷 정도의 간단한 다과가 제공된 소박한 입학식은 작년 기부금으로 마련되었던 것이고, 또 오늘의 기부는 내년 입학식을 위해 사용된다.


사진 : 독일의 한 초등학교 행사의 기부 독려 저금통. 사진 출처 : https://www.gs-taeferrot.de/


‘기부’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를 생각해본다. 절대로 가벼운 단어가 아니다. 큰 힘을 모을 수 있는 용기의 물결이다. 서로를 모르는 우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손을 잡을 수 있는 마음의 문이다. 어떤 사회에서는 이 단어가 주는 보상심리가 자발적인 마음보다 더욱 커서 기부 체인이 원활하게 유지되지 않기도 하지만, 여전히 많은 경우에 ‘기부’라는 단어 앞에는 따뜻한, 순수한, 선한 이라는 형용사가 붙는다. 그리고 이로 하여금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것을 보면 사회에 전달되는 선하고 아름다운 힘이 분명히 있다.


세상에는 마음이 넘치는 아름다운 캠페인이 많다. 코로나 위기, 기후변화, 난민과 전쟁, 질병, 소외로부터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한 우리가 서로를 함께 생각하는 방식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서로의 힘을 더하면 무언가가 모인다. 공동체의 힘과 연대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쓰임이 우리의 미래를 단단하고, 튼튼하게 자라나게 해 줄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제까지 내게 기부 문화가 쉽게 와닿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과 공을 들여 특정한 누군가를 후원하고, 매달 정해진 금액을 이체하거나, 통 큰 기부만이 기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일의 일상 속에 스며든 기부문화와 이에 대한 태도는 전혀 무겁고 낯선 습관이 아니다.


기부 문화는 나와 우리가 함께 사는 지금의 사회가 건강하게 공존할 수 있는 기분 좋은 작은 실천이자 일상의 한 조각이다. 외롭고 낯설고 차가운 세상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마음이 닿는 적당한 거리를 믿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그래서 더 따뜻하고 서로에게 더 다정해질 것이다. 손을 잡는 마음, 작은 저금통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마음, 일상 그 자체에서 나눔과 공유, 그리고 공동의 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마음의 저금통을 가까이에서 찾기를 바란다. 외로운 시대에 서로가 다행일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은 일간지 매일경제 <박소진 시인의 독일 에세이 연재>에  9월 10일 발표했습니다. 브런치에도 함께 올립니다. 따뜻한 어깨를 서로가 맞댈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9/000485060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