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과 정독 그 어디쯤에서(2)
속도감 있는 독서를 하면서 책 읽기의 즐거움을 하나씩 배워갔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고, 급하게 읽었다. 책을 사서 읽기보다는 도서관에서 빌려서 휘리릭 읽고 반납했다. 내 책이 아니라서 접을 수도 밑줄을 그으면서 읽을 수 없었다.
그렇게 2년 정도 읽었을까. 문득 책은 일 년에 100권씩 읽어내고 있는데 머릿속에 남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에 읽은 책에 대해서 누군가 물어본다면, “아! 그 책 좋았어요.”,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어요.” 정도만 말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생각은 많았는데, 말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책 속의 내용들은 정리되지 않은 채, 나의 뇌 속에서 두둥실 떠다닐 뿐이었다. 어쩌면 뇌가 아니라 피부 표면에 아주 얇게 떠다니고 있는 것일지도.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주인공인 ‘라일리’의 머릿속에는 감정 컨트롤 본부가 있다.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가 등장한다. 감정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우연히 기쁨이와 슬픔이가 ‘라일리’의 기억들이 저장된 세계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핵심 기억을 제외한 일부 기억들은 주기적으로 버려지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를 보면서 내 독서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내가 빠르게 읽어내는 기억들은 장기 저장되지 못하고 저렇게 버려졌던 것이구나! 얕게 받아들인 지식은 손쉽게 사라졌다. 1년에 100권을 읽어도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남는 건 소중한 독서 목록 뿐.
이 당시에는 누군가가 일 년에 얼마나 읽는지를 물었을 때, "당당하게 100권 정도 읽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었기도 했다. 하지만 읽는 사람이라는 그 자체를 과시하고 싶었다. “나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야.”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싶었을까. 인정의 욕구는 다들 있겠지만, 지나치면 독이 된다.
그러다가 나의 독서 습관을 완전히 바꾸어 줄 인생 책을 만났다. (나에겐 인생 책이 참 많다. 하하.) 그 책은 바로 박웅현 작가님의 <책은 도끼다> 이다. 많은 분이 읽거나 한 번쯤은 보셨을 책이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책은 도끼다’라고 적혀있는. 요즘 내가 밀고 있는 ‘송곳독서’라는 브랜드도 <책은 도끼다>에서 ‘송곳’을 연상했고, 문유석 판사님의 <쾌락 독서>를 읽으면서 나만의 독서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의 결과이다. 그래서 송곳독서.
<책은 도끼다>는 광고인인 박웅현 작가님이 읽은 인생 책(?)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김훈 작가님, 내가 좋아하는 알랭 드 보통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같은 문학까지. 이 책을 읽고 나서 박웅현 작가님이 소개해준 모든 책을 샀다.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는 그 유명한 첫 문장만 읽어보고 덮어둔 게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아무튼, <책은 도끼다>의 34페이지를 보면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저는 책 읽기에 있어 ‘다독 콤플렉스’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독 콤플렉스를 가지면 쉽게 빨리 읽히는 얇은 책들만 읽게 되니까요. 올해 몇 권을 읽었느냐, 자랑하는 책 읽기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일 년에 다섯 권을 읽어도 거기 줄 친 부분이 몇 페이지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줄 친 부분이라는 것은 말씀드렸던, 제게 ‘울림’을 준 문장입니다. 그 울림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숫자는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보고 잊히는 것과 ‘몸은 길을 안다.’ 이 구절 하나 건져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도 박웅현 작가님의 이 말은 그 당시 나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처음에 이 문구를 읽었을 때는, “그래도 책은 많이 읽어야 해. 사람마다 맞는 독서법은 다르니까.”라고 생각을 하면서 고집부렸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시행착오가 중요하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독서법과 감각적인 느낌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자기만의 느낌을 알아가는 것이 시행착오다. 그 느낌적인 느낌.
<책은 도끼다>를 읽은 후에도 나의 책 사랑은 계속되었다. 일주일에 2권씩은 읽어야 일 년에 100권을 읽을 수 있다. 그렇게 2~3년 독서를 했더니, 권태기가 왔다. 빠른 기간에 많은 책을 읽으면 무언가 깨닫고 인생에 큰 변화가 올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조금의 변화만 있었을 뿐.
그때 나의 독서를 다시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다독에 대한 강박을 버렸다. 읽고 싶은 책을 천천히 읽었고, 좀 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접했다.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자 독서록을 쓰고 싶어 졌고, 독서 모임을 통해서 내가 읽은 내용을 나누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관학교 졸업 후 내 첫 번째 근무지는 ‘경상남도 사천’,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그 길에 있는 곳이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독서모임은 찾을 수가 없었다.
까짓것 내가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열정이 있는 젊은 장교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인생 첫 번째 독서모임이었던 ‘구서회’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 책과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