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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하글 Apr 26. 2024

눈 보다 마음이 훨씬 더 아팠던 시절

가정폭력의 피해자

2004년 초등학교 졸업식날 엄마랑

1. 퇴원은 하고 난 후 어떻게 되었냐고?


예상했다시피 실명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망막박리는 위험하지만, 그때는 망막박리가 되면 거의 다가 실명하던 시절이었다. 수술비가 있었어도 내 눈을 살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내가 크고 수술비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원망과 미움을 떨쳐내려 부단히 노력했던 거 같다. 아무튼, 사고 이후로 내 오른눈 검은 자에는 하얀색 상처가 생겼다. 아이들은 나를 보며 괴물, 애꾸, 외계인 등 놀려대기 바빴고 나는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너무 싫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왜 이렇게 놀림당해야 하는지 내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 건 불편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과 아이들의 놀림 어딜 가나 무례하게 질문해 오는 사람들이 너무 미웠다. 내가 자아가 생긴 후로 쭉 나는 내 오른눈을 감추기 위해 하늘보다는 땅을 보고 걸었다.


2. 그 당시 나의 하늘은 흙색이었다.


그래도 나는 씩씩하게 친구도 만들었다. 아니 오히려 더 씩씩한 척 지냈다고 해야 하나? 노래도 하고 춤도 추며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오락부장도 했었다. 내가 그렇게 밝은 척 지냈던 건 비단 눈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 가전환경 탓이 상당부분 차지했을 것이아.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에는 경찰이 왔다 갔고 일주일 동안 6일은 비명과 함께 살아야 했다. 집 곳곳에는 항상 유리조각이 굴러다녔다. 어린 난 아침이 되면 그것을 치우느라 바빴고 밤이 되면 그 상황을 말리느라 바빴다. 말리면서 참 많이도 맞았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오빠들도 허구한 날 뚜들겨 맞고 한겨울에도 알몸으로 밖에 쫓겨나갔다. 불도 여러 번 질렀고 초등학교 때는 우리 집이 고깃집을 했고 우리는 그곳에서 자주 먹고 자고 했는데 밤이 되면 주방에 있는 조리도구 중 날카로운 것은 다 숨겨놔야 했다. 그렇게 숨기고 방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큰소리가 시작되었고 나는 울면서 이불을 덮어쓰다 어머니가 죽을까 봐 겁이 나서 나가서 말리곤 했다. 그런 생활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아니 얼마 나가 아니지 그 사람과 사는 내내 그렇게 살아야 했다. 우리가 도망쳐 나오기 전까지 아마 도망쳐 나오지 않았다면 누구 하나라도 그 사람 손에 죽었을 것이다.


3. 승하야, 엄마 간다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우리는 아버지를 피해 도망쳐 어머니의 고향에 왔다. 2001년 마지막 날까지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일하던 장례식장에서 잠시 잠이 들어 늦게 들어왔다는 이유로 원목으로 된 큰 상을 들고 어머니 머리를 내리쳤고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셨다. 그렇게 철철 넘치는 피와 함께 쓰러져 있던 어머니를 걱정돼서 나가본 내가 발견을 했다. 나는 그때 진짜 어머니가 죽은 줄 알았다.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인 내가 울부짖으며 아버지에게 오만 욕을 다 했던 거 같다. 그 소리에 어머니는 눈을 뜨셨고 그 자리에서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시고는 방으로 들어가 짐을 싸셨다. 그리고 근처 여관으로 가 하루 쉬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짐을 들고 문을 나가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승하야, 엄마 간다? 같이 갈래? 지금 엄마 갈 건데 이제 가면 엄마 못 본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한 발짝만 더 움직이면 진짜 죽여버리겠다고 말하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엄마 먼저 가라 내가 이따가 따라갈게


하며 어머니를 보냈다.


4.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작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2002년 1월 1일이었다. 이내 아버지는 오빠들을 불러 빨리 나가서 어머니를 잡아오라고 했고 우리는 그 추운 겨울 겉옷 하나 못 걸치고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는 근처에 주차된 자동차 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셨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 맞은 머리가 5㎝ 이상은 찢어져 눈도 팅팅 부어있었고 온몸이 만신창이였기 때문. 무튼 그렇게 우리는 그 길로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쳐서 삼촌네 가게에서 신세를 지며 나는 학교에 다녔고 오빠들은 각자 직업훈련소를 다녔다. 전학 온 학교에서는 친구도 나름 사귀었다. 고학년에 되어서 그런지 내 눈을 보며 대놓고 놀리는 아이들은 없었다. 대부분 뒤에서 이야기했지만 어쨌든 익숙해진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내 성격이 좋았는지 친구들은 다행히 나를 좋아해 줬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가난했지만 더는 맞을 일도 밤마다 어머니가 죽을까 봐 무서워할 일도 없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오늘은 눈 이야기보다 제 어린 시절 가정사 이야기가 많았어요 이것 또한 제아픔이니까요. 이렇게 덜어내다 보면 언젠가 제 머릿속에서도 가슴속에서도 지워질 거라 믿어요. 언제까지나 품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쓰면서 떠올리니까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네요.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우리 가족 모두가 괜찮으니까요. 그냥 어린 날의 저와 지난날의 우리 가족이 참 고생을 많이 했다 싶어요 다들 많이 아팠겠다 싶네요.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할게요! 다음화에서 봐요 우리! 오늘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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