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과 약

by 유칼리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 중에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자주 가던 동네 상가에 위치해 있다. 길치에 가게 위치도 정확히 잘 기억 못 하지만 왜인지 지나가며 이 병원 간판을 유심히 봐두었다. 4층에 위치한 병원을 계단으로 올라갔다. 병원 문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람이 붐비는 상가였기 때문에 아는 동네 사람이 있을까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OO정신건강의학과. 작은 한숨을 내쉬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병원은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소파에는 두 분이 앉아 기다리고 계셨다. 간호사가 건네는 질문지들을 들고는 멀찍이 자리 잡고 앉았다. 질문지는 최근의 정신 건강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문항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정성껏 질문에 답했다. 질문지를 작성해 제출한 후 양손을 무릎에 포개어 얹고 차례를 기다렸다. 성스러운 제례를 치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간호사의 설명으로는 이 병원이 상담 중심이 아닌 처방 중심 병원이라고 했다. 20여 분간 환자의 이야기를 청취하고 의사 선생님의 질문이 이어진 후 검사결과와 종합해 적절한 약 처방이 내려지는 시스템. 길게 말할 기력도 없는데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모니터에 내 이름이 떴고, 모자를 눌러쓰며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의사 선생님은 50대 후반~60대로 보였고 머리를 왁스로 깔끔하게 빗어 넘긴 점잖으신 인상의 남자분이었다. 무슨 일로 오게 되었냐는 물음에 입을 뗐는데 내 입에서 술술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깜짝 놀랐다. 오기 전까지 머릿속은 일련의 사건들과 감정들로 뒤죽박죽 혼돈 그 자체였다. 병원에 와서도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서 얘기해야 할까 걱정스러웠는데. 내 입은 기다렸다는 듯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 그랬었지. 지금 내가 이렇구나. 이런 기분이구나.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 선생님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한 말들을 열심히 컴퓨터에 입력하셨다. 가장 힘든 부분이 뭐예요? 선생님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잠을 자고 싶다고,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사실 그건 정답이 아니었지만. 가장 필요한 답이었다.


20분 간의 상담과 진료 결과로 간호사로부터 처방약을 받을 수 있었다. 정신건강의학과는 병원에서 직접 약을 받을 수 있구나. 내 이야기를 아무 소리 없이 들어주고 약도 직접 주다니. 약봉지를 소중히 받아 들었다. 매일 또 다른 하루를 마주하는 게 버겁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간절히 살고 싶었나 보다. 나한테 약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 없었다. 병원에 와서 약을 들고 선 내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았다.




약을 먹었다. 이제 잠을 잘 수 있다. 마음이 편안해졌고, 몽롱해졌고, 잠이 들었다.

일을 할 수가 있다. 움직이고 앞으로 갈 수가 있었고, 회의도 할 수가 있었다.


다만, 약 용량을 올리니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전 02화도파민과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