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이란현, 자오시마을
[동네사람처럼 살고 싶은 곳] 원래 그 마을에 살았던 사람처럼 느긋하게 머물고 싶은 곳,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풍경이 아름다운 곳, 마음까지 머물고 싶은 마을을 추천합니다.
<주거로운 로컬생활> 매거진 16호로 소개드릴 곳은 대만 동북부의 이란현(Yilan County)에 위치한 자오시(Jiaoxi) 향입니다. 면적 약 101 km²에 인구 약 35,000명 정도로 테마가 명확한 온천마을이자 지역의 핵심 관광 거점입니다. 3박 4일 일정 중에 하루만 머문 곳이지만 다시 방문한다면 이 마을에서만 일주일 정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지금부터 자오시마을의 매력과 과 이 지역에 글로벌 관광 자원인 카발란(Kavalan) 위스키 증류소의 경험을 공유해 보겠습니다.
온천마을이 품은 글로벌 증류소
이번 3박 4일의 대만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공간은 쇼핑 거리도, 유명 야시장도 아니었어요. 이란현 자오시(Jiaoxi)에 위치한 카발란(Kavalan) 위스키 증류소였죠. 술을 짝사랑하는 저로서는 살짝 기대되는 정도의 코스였는데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만 위스키를 직접 보는 경험’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공간을 직접 걸으며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카발란 증류소는 온천마을로 알려진 이란현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어요. 보통 글로벌 기업의 생산 시설은 외곽에 숨겨져 있거나, 철저히 통제된 공간으로 존재하는 곳이 많은데요. 이곳은 증류 설비와 숙성 창고, 전시장, 시음 공간, 레스토랑까지 하나의 동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어요. 방문객은 ‘관람객’이 아니라, 이 브랜드가 태어난 환경 속으로 초대받은 사람이 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 개방적인 구조를 보며 떠오른 것은 자연스럽게 창업자가 궁금해지더군요. 그래서 바로 알아봤습니다.
카발란을 만든 이는 이천채(李添財). 그는 처음부터 위스키로 성공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어린 시절 가난 속에서 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일했고, 이후 살충제와 음료 사업으로 기반을 다졌다고 해요. 대만에서 ‘미스터 브라운 커피’를 성공시킨 인물입니다. 이미 충분히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가,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서 다시 도전한 것이 바로 위스키였어요.
더 흥미로운 점은 가장 어려운 선택지를 골랐다는 사실이죠. 대만은 전통적인 위스키 생산지가 아니라서 기후도 스코틀랜드와는 전혀 다르고, ‘대만산 싱글 몰트’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란현의 물과 기후, 온천지대 특유의 환경이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리고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대만을 세계 위스키 지도 위에 올려놓았다고 해요.
카발란 증류소의 태도는 이 창업자의 인생과 닮아 있었습니다. 과시하지 않고, 숨기지 않으며,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다는 점이죠. 생산 현장을 그대로 열어두고, 지역의 자연조건을 브랜드의 핵심 스토리로 삼고 있었어요. 이는 단순한 마케팅 전략이 아니라, 지역과 함께 가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졌으니까요. 우리는 종종 ‘무엇을 더 만들 것인가’에 집중하지만, 카발란은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머물게 할 것인가? 어떤 태도로 공간을 열 것인가? 관광객이 스쳐 가는 소비자가 아니라, 시간을 보내는 체류자가 될 때 비로소 지역은 살아난다는 걸 직접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로컬 관광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정책과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데요. 그러나 여전히 많은 지역은 ‘잠깐 들렀다 가는 곳’에 머물고 있어요. 체험은 있지만 체류가 없고, 이벤트는 있지만 삶의 리듬은 느껴지지 않았죠. 카발란은 이 지점에서 중요한 힌트를 주고 있었어요. 로컬 관광은 관광객을 얼마나 많이 끌어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머물게 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을요.
이란현에서의 하룻밤은 그런 생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숙소는 Orient Luxury Hotel – Jiaoxi였어요. 이 호텔은 단순히 ‘좋은 숙소’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야외 온천과 수영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고, 모든 객실에는 테라스와 개인 욕조가 딸려 있었습니다. 욕조에 몸을 담그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산이었죠. 도시의 소음 대신, 바람과 습기,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어요.
이 공간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배웠으니까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러나 생각은 오히려 더 깊어지는 시간. 이것이야말로 런케이션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란현은 하루 만에 소비할 수 있는 지역이 아라는 생각이 깊어지기도 했어요. 오히려 천천히 머물수록 매력이 드러날 것 같았으니까요. 다음에 다시 대만에 온다면, 타이베이보다 이란현에서 이틀 이상 머무는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는 온천과 숙소에 머물고, 하루는 증류소나 지역 공간을 천천히 걸으며 보내도 충분할 것 같았으니까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이란현은 ‘어디에서 머물 것인가’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을 더 하고 싶은 공간으로서 매력이 충분했습니다.
한국의 온천마을, 소도시, 로컬 브랜드들은 왜 아직 이런 공간을 만들기 어려울까. 기술이나 자본의 문제라기보다는, 개방성과 신뢰, 그리고 시간에 대한 관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다시 확신하게 되었죠. 로컬 관광의 미래는 ‘구경’이 아니라 ‘체류’에 있고, 런케이션의 본질은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결을 바꾸는 일에 있다는 점을요. 이란현의 온천마을과 그 안에 자리한 글로벌 증류소는, 그 사실을 아주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란현에서의 하룻밤은 그 생각을 몸으로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공간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가치를 다시 배우게 된 것이죠. 일정이 비어 있어도 불안하지 않고, 오히려 생각은 더 깊어지는 시간의 의미,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런케이션의 본질입니다. 일과 쉼을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다시 설계하는 것. 이란현은 그런 리듬을 허락하는 지역이었죠.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그리고 어디에서 가장 ‘나답게’ 머물 수 있는가?
카발란 증류소와 그 창업자의 선택은 나에게 분명한 힌트를 주었어요. 로컬 관광의 미래는 이벤트가 아니라 철학에 있고, 런케이션의 핵심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는 점을 다시 깨달았죠. 온천마을 한가운데에서 세계적인 위스키를 만든 한 사람의 선택처럼, 지역을 믿고 시간을 들이는 일. 그 조용한 확신이 결국 가장 강한 경쟁력이 된다는 사실이죠.
머무는 여행이 지역을 살린다
카발란 증류소를 나서며 오래 남은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산업은 숨겨질수록 비용이 되지만, 열리는 순간 관광이 된다는 점이었어요. 위스키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위험 요소가 아니라 이야기였고, 생산 시설은 지역의 부담이 아니라 머무를 이유가 되니까요. 공정을 가리고 결과만 내세우는 대신, 과정 전체를 신뢰하고 공개하는 선택. 그 선택이 온천마을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지역 경제의 결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로컬 관광의 핵심은 이미 존재하는 산업과 시간을, 어떤 태도로 열어두느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온천마을 한가운데 열린 증류소처럼, 지역도 자신이 가진 것을 숨기지 않을 때 비로소 여행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