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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Jang Oct 18. 2024

윈디 시티 블루스 (2/3)

2.

펠로우쉽 스쿨 로비 벽에 설치된 골동품 가게에서나 봄직한 커다란 자명종 시계가 밤 열 시를 가리켰다. 오후 세 시부터 일을 시작한 건호와 제이는 고등학교 여자 화장실을 부지런히 청소 중이었다. 건호의 목덜미에 땀이 고 떨어지고 맺히고 떨어다. 미국 계집애들의 몸은 확실히 성장이 빠르다,라고 건호토일렛 뚜껑을 페이퍼타월로 닦으며 말했다. 십 대 여고생의 육체가 성인의 그것을 방불케 한다며 그는 계속해서 주절거렸다. 헛소리 말고 얼른 끝내자, 집에 가서 한국 드라마 봐야 , 이제 막 스토리 전개가 흥미진진하게 되던데 말이야,라고 이는 화장실 세면대 거울에 유리세정제를 뿌리며 말했다. 인생을 즐기는 방법이 고작 한국 드라마나 보면서 킬킬 또는 흑흑거리는 것 밖에 없느냐고 이퍼타월을 휴지통에 버리며 건호가 조롱하듯이 말했다. 제이는 포르노 채널 구독으로 한 달에 백 불 이상 쓰는 놈보단 그래도 내가 낫지,라고 말하며 뿌연 거울을 닦았다. 건호의 벌게진 얼굴이 깨끗해진 거울에 반사되어 비쳤다. 건호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헤헤, 그렇게 반격할 줄이야, 하고 웃었다. 제이가 굳게 잠겨 있던 교장실 문을 열쇠로 열었다. 교장실은 청소를 안 해도 항상 깨끗한 편이었고 카펫에서도 향긋한 방향제 냄새가 났다. 데스크 위로 교장이 그의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이 보였는데 그들 뒤로는 에펠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언제 파리에 한번 가볼까,라고 건호가 사진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제이가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훑어보았다.

"넌 자식아 또 책이냐! 아니... 그게 뭐야?" 제이에게 한 마디 하던 건호의 두 눈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며 그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제이가 꺼내든 아메리칸 히스토리 책 속에 껴있던 돈이 그가 책장을 팔락팔락 넘기자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지폐들 카펫 위로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호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돈을 집어 들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돈을 세는 건호의 눈동자가 시베리안 호랑이처럼 빛났다. "이거 천, 천 불이다.” 건호가 침을 꼴깍 삼키며 제이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제이의 얼굴 위로 창문을 뚫고 침입한 파란 달빛이 떨어졌다.

"오늘 완전히 삼팔광땡 잡았다. 사이좋게 오백 불씩 나누자." 건호가 긴급히 제안했다. 그러자 제이는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입을 열었다. "천 불이나 되는 돈을 교장이 모를 리 없어. 알게 되는 순간 바로 고사장한테 전화할 거야. 누가 돈을 훔쳐갔다고. 그럼 너랑 나랑 절도죄로 감옥에 갈 수도 있어. 어쩌면 추방이 될 수도 있어."

"순진하긴, CCTV도 없는데 시침 뚝 떼면 그만이지. 이 돈 그냥 꿀꺽하자." 건호의 눈에서 강력한 고압전류가 흘러나오며 반짝거렸다.

"돈 있으나 없으나 우리 인생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도로 집어넣자.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도둑질을 하는 건 진짜로 아니다." 제이가 돈을 꽉 움켜쥐고 있는 건호에게 말했다.

"왜 갑자기 성인군자처럼 행동하냐? 세상에 도둑놈들이 얼마나 많아!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 이용하는 인간들이나 저기서 돈 받아 처먹는 부패한 정치인들이나 노동자들 등쳐먹는 기업주들이나, 그런 자식들이 진짜 날강도들이지. 너나 나 같은 하루살이 청소부들이 이런 횡재를 좀 챙겼기로서니 도대체 뭐가 그리 잘못됐다는 거냐!" 건호는 흥분한 목소리로 제이를 설득했다.

제이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눈을 뚫어지게 몇 초간 쳐다보았다. 제이의 확고한 눈빛은 돈으로 인해 잠시 다른 세상으로 날아간 건호의 정신을 온전하게 제자리로 돌리는 데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 자식이... 뭘 그렇게 쳐다봐...”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던 건호의 태도가 수그러들었다. "너 언젠가는 오늘의 이 결정을 후회할 거다.마지못한 얼굴로 건호 책갈피 속으로 돈을 집어넣었다. 그가 책장에 책을 꽂으려는 순간 제이가 그의 손에 있던 책을 낚아챘다. "무슨 짓이야? 날 못 믿는 거냐?" 건호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제이가 책 속에 꽂힌 돈의 액수를 확인했다. 아홉 장이었다. 백 불이 모자랐다. 건호가 구시렁거리며 언제 집어넣었던지 바지 뒷주머니에서 백 불을 꺼내 제이에게 건넸다.

"요즘 본다는 한국 드라마가 추리물 장르냐? 셜록홈스도 아니고 어떻게 알았지?" 건호가 기가 막히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를 간파하는 데에는 내 뇌 용량의 0.01%만 사용해도 된다. 네 이마에 흐르는 땀 좀 봐라. 찜질방에 있다가 나온 놈 같다." 제이가 웃으면서 건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건호는 어쩐지 다들 나한테 포커페이스라고 하던 데, 포커를 쳐서 따본 적이 없다니까,라고 말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농구장으로 이동했다. 건호는 바퀴가 달린 커다란 쓰레기통을 코트 하프라인 쪽으로 끌고 왔다.

"백인 애들 학교에 농구코트는 필요한 거야? 그냥 흑인 애들이 농구하는 구경이나 하지." 건호가 나무 바닥을 기다란 먼지제거용 밀대로 닦으며 말했다.  

제이는 농구공 보관대에서 농구공 하나를 꺼내 가지고 왔다. 중앙선에서부터 드리블하며 그는 속도감 있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자유투 라인에서 멈춘 다음 제이는 솟구쳐 오르며 점프슛을 했다. 볼이 백보드에 부딪힌 뒤 림 안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어쭈구리, 제법인데?” 건호가 밀대를 놓고 걸어왔다.

"삼 년 전인가 자유투 아흔아홉 개를 연속으로 성공시켰던 적이 있었다. 백 개째를 던지려는데 갑자기 심한 복통이 와서 어쩔 수 없이 포기를 했지. 아마도 신이 그의 경지에 도전하는 걸로 이해했나 봐." 건호가 말하며 양손으로 농구공을 감쌌다. 어설픈 자세로 그가 공을 던졌고, 일직선으로 날아간 볼은 림에도 맞지 않고 어이없게 빗나갔다. "에어볼! 아흔아홉 개 연속 자유투 성공? 네 녀석은 입만 열면 구라구먼. 어쩔 땐 네 숨소리마저도 구라 같다니까." 제이가 배를 잡고 굴렀다. 건호는 손목에 경미한 통증이 있어서 제대로 던지지 못한 것이라며 핑계를 댔다. 제이는 농구공을 집어 들어 자유투 라인에 서서 공을 던졌다. 이번에도 깨끗하게 림 안으로 공이 들어갔다. 건호는 자식이 못하는 게 없네,라며 부러운 투로 말했다. 그는 스코어보드를 잠깐 동안 바라보다 느닷없이 이번에는 정말로 고사장한테 청소 구역을 좀 줄여달라고, 당장 내일이라도 네가 한 번 얘기해 보라고, 더 이상 지체를 하면 우리가 이렇게 일하는 걸 고사장은 당연하게 여길 거라고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제이는 농구공을 바닥에 서너 번 튕기다가 알았다고, 이제는 진짜로 말한 때가 온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건호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면서 그의 몸 여기저기에서 쾌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일요일 오전이었다. 제이는 일어나자마자 우유를 한 컵 마시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한 개비 태우면서 잠시 후 고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얘기를 할지를 숙고했다. 제이는 그에게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한 다음에 그들의 요구사항을 고사장에게 최대한으로 정중하면서도 조리 있게 설명을 하면 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제이가 심호흡을 한 후 그의 번호를 눌렀다. 고사장은 여전히 졸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제이는 오후에 잠시 만나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고, 고사장은 후에는 약속이 차라리 저녁에 만나자고 얘기했다. 제이는 저녁도 좋다고 한 후 그와 약속장소를 정하고 통화를 마쳤다. 제이는 즉시 건호에게 연락해 이 사실을 전했다. 건호는 뛸 듯이 기쁜 목소리로 잘했다고 한 후 할 일 없으면 극장에서 영화나 보자고 제안했고, 제이는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그러자고 했다. 그들은 최근에 봉준호 영화 특별선을 상영하고 있는 뮤직 박스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정했다. 두 사람이 극장 앞에서 만나 상영 프로그램과 시간을 확인하니 "살인의 추억"을 보면 딱 맞을 것 같았다. 제이는 "살인의 추억"은 이미 세 번이나 봤다고 하자, 건호는 이 영화를 시카고 뮤직 박스에서 자신과 보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추억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 뒤, 곧바로 티켓 두 장을 달라고 매표소 직원에게 요청했다. 그들이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거리는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알록달록한 네온 간판들이 켜져 있었다. 제이는 고사장과 만나기로 한 던킨도넛으로 향했고 건호는 근처에 있는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커피하우스에서 제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제 제이와 고사장과의 담판 결과에 따라 건호는 노동 환경이 좋아질 수도 아니면 거꾸로 무직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제이와 고사장과의 면담은 삼십 분이면 충분할 거야. 삼십 분이 지나면 제이와 나는 과연 어떻게 될 까. 건호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연하게 타서 달라고 주문한 후, 초조한 표정으로 마일드세븐을 꺼내 입술 사이로 걸었다. 커피숍 종업원이 득달같이 다가와 스모킹프리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건호는 스모킹프리라면 담배를 프리하게 피우는 뜻이 아니냐며 대꾸했다. 종업원은 그의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무식하다, 무식해. 고품격 조크도 모르고. 건호가 구시렁거리며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왔다. 담배에서는 갓 부은 아스팔트 냄새가 났다. 차가운 겨울 밤하늘에 박혀 있는 달과 그 바로 옆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작은 별 하나가 보였다. 저 별은 커다란 달 옆에서도 기죽지 않고 자신만의 빛을 발하는구나. 건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다시 커피숍 안으로 들어온 건호는 카페 안에 구비된 잡지들 중 이치로 스즈키가 표지 모델로 쓰인 ESPN 매거진을 뽑아 들었다. 영어잡지였기에 그에게는 그림책이나 진배없었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을 때, 제이의 차가 커피숍이 위치한 상점가로 막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건호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제발 불쌍히 좀 여겨주십시오. 제발 청소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발 자비를 좀 베풀어 주십시오. 영주권도 없는 나나 제이가 이 직장을 잃으면 정말로 갈 데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고사장 욕도 매일 같이 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리고 또 이참에 포르노도 가급적 줄이겠습니다. 아니, 확 끊어버리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확실하게 도와주십시오. 건호는 절실했던지 평상시에는 전혀 찾지 않던 신을 찾으며 그에게 자비를 구했다. 제이가 커피하우스 앞 주차공간에 차를 세웠다. 그는 바로 내리지 않고 시동을 켠 채 잠시 차에 남아있었다. 저 자식은 빨리 안 들어오고 뭘 하는 거야. 일부러 사람 애간장 태우는 것도 아니고. 체온보다 더 차갑게 식은 커피를 건호가 단숨에 들이켰다. 전화통화를 끝낸 제이가 차문을 열고 내렸다. 제이는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저 녀석이야말로 희대의 포커페이스구나. 건호는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이제 보니 그가 앉아있던 주황색 소파에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제이가 그 구멍을 발견하고 말했다.

"어쩜 그렇게 정확하게 구멍 위에 앉아있냐? 구멍 찾는 데는 너를 따라갈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당연한 소리 말고... 그래, 고사장이 뭐래?" 건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원래 제이는 건호를 잠시 골탕 먹인 다음에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했지만, 그의 퀭하고 추레한 몰골을 보고는 측은지심이 생기면서 그저 사실대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잘됐어. 내일부턴 고등학교만 청소하고, 대신 일주일에 세 번, 학교 바로 옆에 있는 교회를 청소하래. 페이도 그대로 줄 거라고 했어. 고사장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지 오늘따라 너무나 친절하게 말을 하는 거야. 그 인간이 싫어하는 사람한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 제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건호는 커피숍에 있는 다른 손님들이 보든 말든 감격에 벅차 소리쳤다. "오 예! 도대체 누가 감히 신은 죽었다고 했던가, 신은 진정으로 살아있다! 더군다나 교회청소라니, 우리 같은 포르노 중독자들에게! 아니 나만 중독됐지, 아무튼 이게 웬 어메이징 그레이스란 말이냐!" 건호가 환희에 찬 모습으로 주먹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고사장 이 인간이 웬일로, 내가 짐작했을 땐 결의에 찬 내 눈빛을 보고 자기를 노동청하고 INS에 찌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한 것 같다. 내가 먼저 번에 봤을 때 눈을 위아래로 희번덕거리며 그 인간을 옆에서 째려봤었거든."

그의 말에 제이는 껄껄거리고 웃으면서 출출한데 감자탕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두 사람은 커피숍 바로 맞은편에 있는 24시간 감자탕집을 향해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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