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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꾼의 목장 Feb 18. 2021

386세대, 그 거추장스러운 (1)

나는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 때인 80년대 초중반 대학을 다녔다. 지금은 백주대로에서 대통령이 빨갱이라고 외쳐도 표현의 자유라고 인정받는 세상이 됐지만, 당시에는 학교 앞 선술집에서 '아침이슬'을 부르다가 용산 경찰서로 끌려가 얻어터지고, 반성문 쓰고 나서야 풀려나는 시절이었다. 교정엔 늘 터지고 남은 매캐한 최루탄 가루들이 낙엽과 섞여 바람에 흩날렸다. 걸핏하면 교문이 잠겨 오전부터 당구장으로,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던 그리 아름답지 못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느 친구들처럼 시위에 앞장서는 학생은 아니었다. 머리에 '군부독재타도'라고 질끈 동여맨 친구가 기어코 도서관 구석에 숨은 나를 찾아내면 마지못해 따라나가 맨 뒤에서 주먹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이 전부였다. 왜 시위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도 찾지 못했거니와 '민주화'라는 것이 과연 목숨과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판단할 만큼 머리가 깨지도 않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 또한 미숙하고 어렸기 때문이었다. 정치나 민주화, 통일에 대한 관심보다는 강의 끝나면 어디 가서 놀까를 궁리하던, 아무 생각 없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학교 교정을 빨갛게 물들인 현수막들은, 초등학교 입학 후로 대학 진학 전까지 끊임없이 받았던 반공교육의 영향인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질적인 문화였다. 80년 광주에서 일어났었다는 그 사태가 정말 민주화 운동이었는지, 불순분자들의 폭동이었는지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나 한 사람 때문에 세상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고, 그깟 민주화 안돼도 졸업해서 좋은 회사 들어가면 먹고사는 데 지장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1980년대의 학생운동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군부정권에 의한 무력진압과 학살에 대한 청년층(대학생을 주축으로 한)들의 전국적 저항이었다. 이 시기의 학생운동은 강한 이념적, 민중적 성향을 보였고 결국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밑거름이 된다. 이 시기의 학생운동가, 민중운동가들은 개인적 저항의 차원을 넘어 보다 조직적으로 결속되어 공장, 빈민촌, 농촌 등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지금도 한국 민주화 항쟁의 주역으로 평가받는 386 세대의 역사는 그렇게 80년대 대학가의 거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의 시국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대학생 대표들은 늘 간첩 혐의를 쓰고 뉴스에 나왔다. 전두환의 통치는 폭압이었다. 무수한 언론사들과 회사들이 공중분해 되었다. 국민들의 기본권은 제3공화국 시절 수준으로 후퇴했다. 김영삼,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정치인사들은 가택연금되거나 정치의 길이 막혔다. 야당인사들은 아예 공천의 길을 막아버렸다. 국가안전기획부를 필두로 한 공권력에 도전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고작 내 또래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전투경찰들이 늘 교문 앞에 늘어서 있었다.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써 땅을 보고 걸었다. 그들의 눈은 항상 '걸리기만 해 봐라, 껍질을 벗겨 버릴 테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듯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전투복을 입고 전방도 아닌 대학가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는 자신들의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화사한 옷을 입고, 머리를 기르고 자유롭게 '연애질'이나 하며 선택받은 대학생활을 즐기는 우리들에 대한 질투성 분노였지 싶다. 그들 중엔 분명히 대학을 휴학하고 군 복무 중인 친구들도 많았으리라.


나는 두려웠다. 동아리(그때는 서클이라고 불렀다) 방에서 광주 사태 때 외국인 기자들이 촬영했다는 문제의 영상을 본 뒤로, 친구 한 녀석이 청바지 청자켓 입은 백골단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을 본 뒤로, 학교 정문 앞에서 전투경찰에게 가방을 거꾸로 탈탈 털리는 수모를 겪은 후로, 잘못한 것도 없이 얼떨결에 닭장차에 끌려 들어가 30분 동안 버스 바닥을 벌레처럼 기며 온갖 조롱을 당한 이후로는 그나마 가물에 콩 나듯 한 번씩 참여했던 내 짧은 시위 전력(?)도 끝이 났다. 맞고 싶지 않았고, 죽고 싶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분신, 투신의 당사자가 내가 돼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섰다. 당시 정권의 실세들은 나 같은 일개 학생이 어떻게 항거한들 흠집 하나 날 것 같지 않은 거대하고 두려운 태산 같은 존재였다.




세상과 애써 외면하고 학교, 당구장, 술집, 아르바이트, 그리고 어설픈 연애... 무의미한 대학생활로 시간을 축내고 있던 나의 머리를 확 깨게 한 것은 미국에 있던 절친으로부터 받은 편지 한 장이었다.


"나는 미국 오기 전까지 김대중은 간첩인 줄 알았고, 전두환은 빨갱이들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한 영웅인 줄만 알았지. 외국에 나와서 살다 보니까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철저히 속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어. 김대중 씨는 미국에서 정말 존경받는 정치인이자 민주화 운동가이고, 경제 전문가이고, 정치학도들의 롤모델이야. 반면에 지난번 전두환이 LA에 방문했을 때 한인타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려고 하다가 교민들이 밀가루와 계란을 던지면서 극렬히 항의하는 바람에 한 블록도 못 가고 철수한 거 아니? 한국 뉴스엔 그런 거 나오지도 않겠지만... (후략)"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세상은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나 혼자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외면한 진실을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데 나 혼자만 비겁하게 숨어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는 내 스무 살 젊은 날은 쓰레기처럼 폐기 처분될 것만 같았다. 도서관 제일 구석자리에서 뛰쳐나와, 마스크에 헬멧을 쓰고 까만 곤봉을 휘두르는 청자켓 무리들의 공포 속으로 이빨을 악물고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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