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한 선언
오늘 피칭살롱 코칭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묘하게 마음이 오래 흔들렸다. 오늘 만난 창업자는 말 그대로 ‘훈련된 피칭’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단어를 잊어버렸다고 멈췄고, 숫자 질문에는 솔직하게 “그건 아직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야기는 허술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하게 남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오늘에서야 정확히 알았다.
창업한지 이제 5개월 남짓된 그녀는 처음부터 완벽해 보이려 했다. 피칭대회를 준비하면서 심사위원이 뭐라 할지, 다른 팀이 얼마나 준비됐을지, 혹은 실수하면 어떻게 보일지—그 모든 시선이 그녀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 영향 탓인지 본선에서 그녀는 발표 초반, 단어 하나가 생각나지 않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몇 초가 그녀에게는 아마 아주 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숨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지금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요. 잠시만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이어갔다.
그 장면은 내가 생각한 ‘성공적인 피칭의 공식’과는 전혀 다르지만,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강렬했다.
오늘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심사위원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몸이 굳고 말이 흔들립니다. 하지만 지금 이 일을 왜 시작했는지, 왜 멈추지 않는지—그 진심으로 돌아오면, 말은 자연스럽게 흐릅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아주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맞아요. 저는 이 아이템을 돈 벌려고 시작한 게 아닙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아무도 안 해서 제가 시작한 거예요.”
그 한 문장이 모든 숫자, 계획, 기술 설명보다 더 큰 울림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선명’해졌다.
피칭의 목적은 누군가를 설득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를 선언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종종 피칭을 “전략”으로만 이해한다. 슬라이드 구성, 스토리 구조, 투자 관점, 시장성 검증, 수익모델.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요소가 완벽해도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발표는 공기처럼 사라진다.
반대로 자료가 덜 정리되고, 숫자가 다 준비되지 않았어도 창업자가 이 문제를 왜 붙잡았는지, 왜 포기할 수 없는지, 왜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지,
그 솔직한 메시지가 들리는 순간, 피칭은 청중을 향한 발표가 아니라 창업자 스스로을 향한 ‘선언’이 된다.
“나는 평가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대신해
이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그녀가 이 말로 피칭을 마무리할 때면, 나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었다. 심사위원의 표정도, 점수도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를 했었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오늘 내가 기록해야 할 가장 큰 배움이다.
피칭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설득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다.
누군가를 감동시키려 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에게 충실해야 한다.
오늘의 코칭은 그래서 오래 남을 것이다. 아마 그녀가 아니라, 내가 더 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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