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원칙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꼬이는 거다

대화” 대신 “통제”를 택한 회사의 말장난

by 기록하는노동자
시작은 정중했다

“귀 조합의 설립이 회사 발전과 노사협력의 발전적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2022년 9월 16일, 회사가 노동조합에 보낸 첫 공식 공문은 그렇게 시작됐다.
며칠 뒤인 9월 20일, 두 번째 공문도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노동조합의 상견례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고, 분위기는 비교적 정중했다.

9월 22일에 받은 세 번째 공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 조합과 회사의 협력과 발전적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조금은 바뀐 표현이었지만, 여전히 겉으로는 협조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그 공문은, 우리가 요청했던 9월 23일 상견례 일정을
하루 전 퇴근시간에 ‘내부 사정’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내용이었다.
그 날이 전환점이었다.


회사공문.jpg 회사가 상견례 하루 전 퇴근무렵 보낸 공문


“법과 원칙”이라는 신호

10월 5일, 네 번째 공문에서 처음 등장한 문장.
“법과 원칙에 따른 합리적인 노사관계가 정착되기를 기원합니다.”

그 문장은 이후 회사가 보내는 모든 공문의 첫 줄에 고정처럼 붙었다.
10월 17일, 담당 부서가 HR팀에서 DX팀으로 바뀐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2025년 회사는 DX팀을 ER팀으로 이름을 바꿨다.

아직도 이해안가는 건 왜 노동조합 대응하는 팀이름을 DX로 지었는지이다.)

노사관계를 관리하는 실무조직이 바뀌고, 같은 문장이 반복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회사는 점차 ‘대화’보다 ‘통제’를 앞세우기 시작했다.

노조는 교섭을 제안했고, 회사는 “법과 원칙에 따라 검토하겠다”는 말로 시간을 끌었다.
상견례는 기약 없이 미뤄졌고, 단체교섭은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시작됐다.

그마저도 과장, 대리가 회사를 대리해 나왔고,
첫 실무교섭을 제외하면 모든 교섭은 회사 밖에서, 근무시간 외에만 허용됐다.
참고로 첫 실무교섭조차 본사가 아닌 부천공장에서, 근무시간 이후에 이루어졌다.

대화의 장은 계속 좁아졌고, 노동조합의 활동은 점점 제약을 받았다.



말의 뉘앙스가 아닌, 의도의 변화

처음엔 ‘법과 원칙’이 무해하게 들렸다.
그러나 반복되는 그 문장은, 점차 ‘대화의 거절’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회사는 ‘절차적 정당성’을 말했지만, 그건 철저히 사용자 관점에서만 정의된 법과 원칙이었다.
예컨대 노동조합이 사무실 제공을 요청하면 “검토 중”이라 답했고,
단체교섭 일정에 대해선 “추후 협의하자”고만 했다.

그러나 내부 회의실은 모두 금지되었고, 대화의 문은 닫힌 채였다.
노조가 20일간 협조적으로 기다린 결과는
일방적인 상견례 취소와 사무실 미제공이었고,

그 뒤로 이어진 건 ‘법과 원칙’이라는 말 아래서의 지연과 제한, 그리고 통제였다.


‘그들만의 법과 원칙’은 현실이 됐다

이쯤에서 우리는 물었다.
법과 원칙이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2022년 화물연대 파업 당시, 정부도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하겠다.”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과 대통령이 사용한 그 언어는,
마치 복사하듯 우리 회사의 공문 속에도 박혀 있었다.

법은 살아 있는 규범이어야 하고,
원칙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정반대였다.

회사는 이후에도 줄곧 ‘법과 원칙’을 앞세워 교섭을 회피했고,
노동조합의 정당한 활동에는 징계, 조사, 문제제기로 대응했다.

그들만의 법과 원칙은 조합원들을 조용히 흔들었다.
보이지 않는 압박 속에 일부 조합원들은 자격을 포기했고,
남은 우리는 수많은 위기와 마주해야 했다.


법과 원칙을 내세운 그들, 그리고 고소

나는 어느 순간 고소를 당했다.
노동조합 활동 중 첫 교섭을 위해 여의도 본사를 들어가려다 막히며 촬영된 영상,
그리고 통화녹음을 유튜브에 게시한 것이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경찰과 검찰은 모두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노동조합 활동의 맥락 속에서 위법성이 없었다는 판단이었다.

(※ 회사가 위원장과 사무국장을 고소한 사건에 대해서는 추후 다루겠다.)

회사는 법과 원칙에 따라 검찰 항고와 재정신청까지 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그런 사유가 내 해고 사유에도 들어가 있는 것이 아이러니다.

회사가 내세운 ‘법과 원칙’은 결국 나를 멈춰 세우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확신하게 됐다.
그들이 말한 법은 진짜 법이 아니었고, 그들이 말한 원칙은 상식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말의 처음과 끝은 달랐다

이제 돌이켜보면, 회사가 처음 보낸 공문의 그 말,
“귀 조합의 설립이 회사발전과 노사협력의 발전적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협력’이 아니라 ‘제어’를 원했다.
대화의 모양은 있었지만, 내용은 없었다.
우리는 함께 나아가자고 했고, 그들은 멈추라 말했다.
우리는 목소리를 냈고, 그들은 통제의 틀을 들이댔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여전히 말한다.
“법과 원칙에 따라.”


KakaoTalk_20250529_225018699.jpg 2022년 10월 28일 노동조합이 요구한 13시 교섭을 위해 간부들이 연차를 쓰고 여의도 본사를 갔으나 출입을 거절당했다.
이 글은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질 노동조합의 싸움에 대한 기록입니다.
공정한 사회를 위한 모든 목소리와 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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