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추부터 꼬이지는 않았었다

노조 설립 첫 20일간의 기록

by 기록하는노동자

2022년 9월 3일 토요일 오후 2시 30분, 신도림역 2층 가온 대회의실에서 노동조합 설립총회를 마치고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다가오는 월요일(9월 5일), 고용노동부에 설립신고서를 접수하려면 준비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급했는지 그 흔한 단체사진조차 찍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KakaoTalk_20250510_155017914.jpg 노동조합 설립신고 접수증
노동조합 설립신고, 비 오는 날의 결심

9월 5일, 설립신고서를 제출하는 날엔 비가 왔다.

당시 나는 공장 영업팀 소속으로, 팀장님과 함께 커피숍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조심스럽지만 당당하게 노동조합 설립 사실을 알렸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권리이며, 이를 숨길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팀장님이 회사에 공유하는 것이, 나로 인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다른 관리자들을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다고 판단했다.


공장장의 전화와 잔잔한 시작

공장으로 복귀한 후, 퇴근 무렵 공장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시 면담하자는 말씀이었고, 응원의 말도 건네주셨다. "천천히 잘 해보라"는 말이 당시엔 큰 힘이 됐다. 그렇게 잔잔한 호수에 조용히 던져진 돌처럼, 파문이 시작되었다.


가입자 300명, 예상을 뛰어넘은 반응

우리 회사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공장이 많고 지방에도 일부 사업장이 있다. 노동조합 가입은 온라인 방식이 현실적이라 ‘캐치시큐’라는 사이트를 통해 신청을 받았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놀랍게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9월 5일 가입현황 : 56명

9월 6일 가입현황 : 199명

9월 7일 가입현황 : 251명

9월 8일 가입현황 : 300명

100명만 넘어도 안심하려던 마음은 금세 현실의 무게로 바뀌었다. 설립만 고민했지, 운영에 대한 준비는 부족했다. 그렇게 허둥지둥 하면서 조합의 기본틀을 갖추는 사이 설립신고서가 9월 8일 오후에 도착했다.


추석 연휴와 첫 공식 알림

9월 9일부터는 추석 연휴였다.

미리 준비한 공문을 통해 HR팀장에게 노동조합 설립 사실을 알렸고, 회사 측의 동의를 받아 인트라넷 메일로 가입 안내도 전파했다. 당시 나는 모든 절차를 합리적으로 진행했고, 회사도 비교적 원만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느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언론 보도, 그리고 반복되는 기사 삭제

9월 8일 설립신고서 수령 직후, 외부 언론에 보도자료를 발송했다. 그러나 보도된 기사는 반복적으로 삭제됐다. 나는 2021년 1월까지 홍보팀에 있었기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 이 사건은 훗날, 인천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가 노동조합의 언론활동을 부당하게 방해한 행위로 판단했고, 행정소송 1심에서도 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현재 회사 측은 고등법원에 항소한 상태다.


명절 기간에 들려온 말들

연휴 기간 중, 고위 임원의 모친상과 수석부위원장의 장인상이 있었다.

나는 두 조문장을 모두 방문했다.

고위 임원의 빈소에서 조문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들은 한마디는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너희들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노조를 만드냐?”

노동조합에 대한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이었다.

며칠 뒤, 수석부위원장의 장례식장에서는 이전 공장장이셨던 임원과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왜 노조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나는 "일한 만큼 대우받고 현장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답했지만, 그분은 그다지 납득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노조 설립 후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이것이었다.

“홍성재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노조를 만든 거다.”

노조위원장이 되면 도대체 뭐가 달라지는 걸까?

그때도, 지금도 의문이다.


부드러운 시작, 그러나 짧았던 평온

9월 21일까지, 우리는 회사에 여러차례 공문을 보냈다.

노동조합 설립 사실 통보

사무실 제공 요청

상견례 제안

HR팀장과는 부드럽게 논의가 오갔다. 회사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고, 우리는 기다렸다.

당시만 해도 기대가 있었다.

"그래도 우리 회사는 다르지 않을까?"

"합리적인 대화는 분명히 가능할 거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진심이겠지"

실무자도 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조합 간부들과 조심스럽게 희망을 품었고

나는 회사와의 첫 상견례 자리에서 어떤 말을 꺼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9월 23일, 노사관계의 전환점

노동조합 설립 20일째 되는 날, 9월 23일로 예정되어 있던 노사 간담회는 회사의 일방적인 통보로 취소되었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노사갈등의 서막이 열렸다.



EU-2022-0001_노동조합 설립통보 및 합리적인 노사관계 정착을 위한 노력 촉구.pdf_page_1.jpg

<안내사항>

저희 유진기업노동조합은 아래의 서류를 준비해
2022년 9월 5일 고용노동부에 설립신고서를 제출했고, 9월 8일 설립신고증을 발급받았습니다.

설립 당시 제출한 서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노동조합 설립신고서
② 규약
③ 설립총회 회의록
④ 총회 참석자 명부
⑤ 임원명부
⑥ 조합원 명부
⑦ (선택사항) 사업장 현황서 : 사업장이 많을 경우 근로감독관이 추후 요구할 수 있습니다.

※ 조합원 가입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온라인 플랫폼 ‘캐치시큐’를 활용했습니다.
※ 설립 이후의 과정은 기록물로 남기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작은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이 글은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질 노동조합의 싸움에 대한 기록입니다.
공정한 사회를 위한 모든 목소리와 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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