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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교섭에 대한 단상 (下)

조건과 신뢰 사이에서

by 기록하는노동자
위임의 결과, 그리고 그 무게

10월 13일, 조합원 전자투표가 끝났다.
투표율 88%, 찬성률 98.32%
압도적인 수치였다.
노동조합의 방향을 위원장인 나에게 일임하겠다는 뜻이었다.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 묘한 복합감정이 밀려왔다.
신뢰의 무게는 언제나 벅차다.
“이제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 문장을 되뇌며,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만 봤다.

조합원의 뜻, 그리고 그 안의 고민

132명이 참여한 조합원의 사전 설문 결과는 이러했다.

조건부 위임 72%

직접교섭 24%

무조건 위임 3%

이 수치는 단순한 여론이 아니었다.

그건 지난 3년간의 싸움과 기다림이 만든 균형이었다.

조합원들은 싸움의 피로를 느끼면서도

“노동조합의 존재 이유”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답은 “회사의 현실을 감안하되 최소한의 기준은 지키자”였다.

조건과 신뢰, 그 사이에서의 줄타기

조건부 위임은 회사에게 부담이다.
“조건”이란 말이 붙는 순간, 협상의 문은 무거워진다.
하지만 조건 없는 위임은 위원장인 나에게 부담이다.
회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책임은 고스란히 조합이 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한다.
조건을 달아야 할까? 아니면 이번만큼은 믿고 맡길까?
회사를 믿는다는 건 결국 “우리가 다시 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을 가져본다는 건 노동조합으로선 용기 있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회사와의 신뢰는 언제 생기는가?

나는 아직 회사가 완전히 변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변하려는 조짐이 있다는 건 느낀다.
교섭 자리에서 서로의 말을 조금 더 들으려 했고
감정 대신 근거를 이야기하려 했다.
그건 시작이다.
신뢰란 거대한 약속에서 생기지 않는다.
작은 행동 하나, 짧은 대화 하나에서 쌓인다.


그래서 나는 회사에 조합원의 입장이 담긴 의견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의견서 맨 마지막에는 문장 하나를 적을 것이다.
“언제든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문장 하나가 닫힌 문을 다시 두드릴 열쇠가 되길 바라며.

2026년을 향한 다짐

2025년의 임금교섭은 단지 시험대였다.
진짜 목표는 2026년 1월에 교섭을 시작해 5월 1일자로 임금인상을 확정하는 것.
그게 우리가 말하는 ‘정상화’다.


임금인상률보다 더 중요한 건 그 과정이 얼마나 공정하고 투명했느냐다.
우리가 다시 싸우지 않아도 되는 구조

대화가 먼저 떠오르는 관계

그게 진짜 승리다.

마지막 독백

나는 요즘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이 위임은 금액의 위임일까, 책임의 위임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조합원들이 나에게 맡긴 건 숫자가 아니라 방향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여전히 ‘대화’ 쪽을 향해 있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싸움은 수단일 뿐, 목적은 늘 대화의 복원이었다.

그래서 이번 교섭이 끝나면 나는 다시 대화를 제안할 것이다.

“이제, 우리 서로 이야기합시다.”


그래서 위임은 어떻게 됐냐고요?

그건 모든게 결정나면 공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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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조록은 상생을 위한 기록이며, 모든 연대와 토론을 환영합니다.
이 글은 노동존중사회로 가는 발자국이며, 함께 걸어줄 모든 손길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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