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지인의 아이에게 가르쳐 준 말 하나
“흙흙흙, 모래모래, 자갈자갈, 돌돌돌…”
요즘 내가 꽂힌 문장이었다. 그냥 인터넷을 보다가 나온 말장난이지만, 이 발음이 굴러가는 것이 너무나 좋았던 나는, 입버릇처럼 이 말을 읊곤 했었다.
물론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이걸 하다간 직장 상사가 나에게 “ㅁㅈ씨, 여기가 무슨 말장난 하러 온거야?” 라는 핀잔을 하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이 말을 읊진 못하지만,
이 굴러가는 발음이 주는 마법을 직장에서 상사들에게 한소리를 크게 들었을 때, 치고 올라오는 신입들이 떠보듯이 내게 말을 할 때,
그래서 “아 젠장 다시 전자궐련을 사야 하냐!” 라는 흡연욕구가 스멀스멀 새나올 때 느꼈다.
화장실에서 이걸 읊으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그런 큰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 확실히 담배 끊은 효과가 있네? 화장 잘먹어?”
“언니, 진짜 그래요? 그래 좀 금단증상이 고통스럽긴 했지만 화장이 잘먹는다니 이리 해야지 암..”
친한 지인, 아니 친한 언니라고 해야 맞을 거 같다. 전 직장에서 동기로 만난 나와 언니는, 처음에는 정말 안맞아서 티격태격 싸웠던 사이기도 했다.
(그 때 결국 처음 전자궐련을 사서 피운게 그 지경이 되고 말았고…)
그러던 어느날 나를 참지 못했던 언니가 “야! 술 한잔 해 새끼야!!” 라는 사자후 한번에 정말 같이 꼭지가 돌아 술을 한잔한 날,
이 언니가 내게 술김에 했던 말은 우리의 관계를 한방에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야! 불만 있으면 말 돌리지 말어 새끼야. 내가 언니고 니가 동생이어도!
가는데 순서 없고, 다들 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거니까!! 서로 흙으로 만나서도 이따구로 갈거냐 새끼야!!…. 흙흙흙흙흙…“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간다. 어쩌면 이것이 삶의 ”본질“ 같은 무언가 였던 것일까.
오히려 그 말을 뱉고도 서글프다고 울던 언니가, 그래도 결혼을 했고, 나는 그 결혼식에 들러리를 섰고, 나는 담배를, 그리고 그 언니는 술에 쩔었던 사이였는데, 그 언니는 어느날 입덧을 했고, 그래서 술을 (그때만큼은 잠시) 끊었고, 나도 그 언니의 순산을 기원(?) 하면서 금연을 하기로 했고, 아기가 생겼는데 그 아기가 딸이고, 시간은 다행히 3년 흘렀고, 그러나 아직도 담배생각은 나지만, 그래도 “조카”에게 역한 냄새를 주기 싫어서 금연을 하는, 이런 30대의 직장인인 내가 있다.
“아, 맞아. 요즘 애가 너 많이 보고싶어하더라? 너 진짜 좋아하나봐?”
“헤헤, 애가 그래도 예쁜건 알아보나봐요 언니?”
“뭐, 그런 거일수도 있고 크크크. 내일도 일 안하는 날인데 놀러올거지?”
“그럴까요? 그냥 이번 회사에서는 그냥 ‘오늘은 재택합니다’ 라고 보고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다음날, 친한 언니네에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와 간식 몇개, 그리고 언니가 좋아하는 글렌피딕도 마트에서 사서 들고 갔다.
“ㄱㅇ아, 이모 왔다!!” “와-”
언니네 아이를 보면 드는 생각은, “아 결혼을 해야 할까?” 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가족들도, 지인들도 항상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버겁고 싫어서 “아, 나는 비혼선언이에요!” 라고 뚝 끊고 말았던 나지만, 이 아기의 빵글빵글한 웃음을 보면서 순간… “아 그래. 나도 딸을 보면 이런 아이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는 하는 그런 기분이 있었다.
“야.. 너는 월급의 반이 카드빚 갚는데 터져나가는데 애 간식을 왜 사와… 그리고.. 글렌피딕 15?! 미쳤냐!! 내가 이걸 좋아해도 이걸 왜 사와!!”
“아… 글렌피딕 15.. 이번에 특별세일 한다고 사왔어. 요즘 글렌피딕 18에 12에 15마저도 정신 못차리면 없어진다는데, 오늘은 일 없는 날이니 ”오픈런“ 한다고 가서 사온거야.“
“그래.. 아주 고맙다 아주… 그런데 그러면 너는 못산거 아니냐?”
“아냐, 나도 사긴 샀지. 물론 나는 위스키를 먹지만 그래도 입맛은 맥주 내지 전통소주야…”
그렇게 담소를 나누다가 저 거실의 TV, 아기는 한글공부 영상을 보고 있었다.
“ㄱㅇ아, 이모랑 말놀이 하자” “말놀이? 죠아!”
말놀이를 하다가 나는 아기에게 이 말을 가르쳐 주게 되었다.
“따라해봐- 흙흙흙” “흙!흑! 흙!”
“모래모래” “모래-모래-”
“자갈자갈!” “자가..자..자가..자갈자갈!”
“돌돌돌!” “돌돌돌!”
“아이구 잘하네!!!”
이걸 보던 언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야! 애한테 그런 이상한거 가르쳐주지 마!! 흙흙흘 모래모래 자갈자갈 돌돌돌이 뭐냐 참나 킄크크킄..”
“그래도 이렇게 발음공부를 해줘야 말이 더 빨리트여 언니!”
“뭐 그것도 맞지만… 아직 3살짜리가 흙이 뭐고 모래가 뭐고 자갈이 뭐고 돌이 뭔지 아니…“
순간 뭔가 생각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언니, 언니는 흙을 만져본적이 언제였어?”
“흠… 등산할 때? 그런데 왜 갑자기 흙이야?”
“그냥 언니랑 이렇게 위스키 하이볼 마시면서 느끼는데, 그냥 갑자기 흙에서 흙으로 라는 말이 생각나서”
“하긴, 그랬지. 그러게… 아까 애기한테 흙흙흙 모래모래 자갈자갈 이야기할 때 느꼈긴 하다 참.”
그러면서 언니가 꺼낸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지금 마시고 있는 글렌피딕 하이볼보다도 더 씁쓸했다. 요즘의 어린이들은 “흙을 만져볼 기회가 많지 않다” 라는 사실을 말이다. 촉감놀이를 할 때도 흙보다는 따로 가소성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진 장난감을, 그나마 조금 안전한걸 써도 곡물가루 재질을 쓰고, 놀이터는 이제 재활용 폐타이어 재질로 만들어진 코팅바닥을 쓰며, 자연 돌보다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콘크리트로 된 벽에 더 익숙해져버렸다는 것을. 어쩌면 그런 아이들에게 그나마 “흙”이라는 것, “모래나 자갈” 같은 것. 그리고 “돌” 같은 것을 만나볼 것이라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교에서 하는 자연체험 때나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뭔가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어졌다.
“참… 씁쓸한 시대야 언니”
“왜?”
“언니는 오래전 나에게 ‘다들 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거니까!’ 라고 했잖아?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어쩌면 흙이란게 뭔지 모르고 사는 아이들도 있을 거 같아서”
“….씁쓸한건 맞지. 물론 아주 나중에 와서야 흙이 뭔지, 모래가 뭔지, 돌이 뭔지 배우겠지만. 이게 가까이 와닿지 않는 때가 온 거 같아.”
“솔직히 오래전, 공상과학만화 같은거 볼땐 그게 멋있어 보였지, 유리와 철근, 플라스틱과 반도체로 가득한 세계.”
“그런데 뭔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잔뜩인 거 같은 세계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래, 오늘 잘했어. 흙흙흙“
“모래모래, 자갈자갈” “돌돌돌”
삑. 삐비빅, 남편분이 왔다
“아! ㅁㅈ씨 왔네요? 같이 식사 하시고 가요”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언니 나 가볼게요. 형부, 죄송해요 술을 먼저 마셔서..”
“아,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요.”
몇일 후, 일이 끝나고 서점에 들러 어린이 동화책을 하나 집었다.
“<돌은 무엇이 될까요> 그래, 이게 좋겠네”
그러고 이걸 친한 언니에게 선물로 주었다.
“언니, 생각나서 아이 선물로 책하나 준다” “돌은 무엇이 될까요? 애가 요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감명깊게 봤다더니 동화책도 이걸 주는구나 푸흡“
“이렇게 나마 돌이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되고 흙이 된다고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 느꼈어”
“내 그럴줄 알고 하나 보여주지” 언니는 갑자기 폰을 열더니 영상 하나를 보여줬다.
“돌돌돌 돌이 굴러서, 깎이고- 쪼개져요. 돌돌돌 돌이 쪼개져 자갈이 되었어요-”
그렇다. 어린이 동요를 따라하는 아이의 영상이었다.
“쳇, 한발 늦었나!”
“아니야, 그래도 이런 챈트 외우는 거보다 동화책 속의 사진자료 보고 외우는 것도 도움이 되는건 맞아.”
“아.. 그래도 귀엽긴 귀엽다.. 아 귀여워…”
언니와 나는 웃었다. 오래 전 새벽, 술자리에서 서로의 서운함을 풀고, 미친듯이 웃었던 그날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