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이이즘 VOL.1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은 모두 카레를 좋아했다. 카레와 김치만 있으면 밥 두 그릇도 뚝딱이었다. 어느 날, 혜성처럼 상에 등장한 카레닭볶음탕은 우리 가족을 새로운 맛의 세계로 이끌었다. 지금은 특별할 것 없는 요리지만, 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맛이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요리를 잘하는 줄 알았다.
우리 같이 장 보러 가요
“요리 잘하는 사람을 실어야지. 왜 굳이 엄마 요리를…”
“그런 건 이미 많아. 딸한테 하기 쉬운 간단한 요리 알려준다고 생각하면 돼요. 뭘 하지?”
갑작스러운 요청에 당황한 듯했지만 엄마는 곧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싫다고 하면 어쩌지?’라고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카레닭볶음탕을 만들기로 한 날, 엄마와 나는 간단히 점심을 먹고 장을 보러 나섰다. 홀가분한 마음과는 달리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한낮의 거리는 너무 더워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차마 전통시장에서 장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마트로 향했다. 함께 양산을 쓰고, 이렇게 다정하게 걷는 것이 얼마만인지. 결혼하고도 늘 반찬을 얻어먹기만 했는데 함께 장을 보러 나오니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마트에 도착한 우리는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카레닭볶음탕에 들어갈 재료를 골라 담기 시작했다. 닭 두 마리, 당근, 버섯 등이 바구니에 차례로 담겼다. 파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엄마에게 제일 싱싱해 보이는 파를 가리키며 “이거 어때?”라고 묻자, “파대가 올라온 건 심이 박혀서 먹기 불편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가 살아온 시절 대부분은 인터넷도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걸 다 알 수 있는 걸까. 신기할 뿐이었다.
변신은 무죄, 2018년식 카레닭볶음탕
집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카레닭볶음탕 만들기가 시작됐다. 엄마는 닭 껍질과 지방을 제거한 후, 누린내를 없애기 위해 소주에 닭고기를 버무려 놓고는 빠른 손놀림으로 채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당근 하나를 입에 넣어주고는 “맛있지?”라고 묻는 엄마. 어릴 적에도 엄마는 요리를 하다가 오이, 당근 등을 한 조각씩 들고 와 TV앞에 앉아있는 자식들 입에 넣어주곤 했다. 당근을 넣어주는 엄마의 손 주름이 몇 년 사이 훅 깊어진 거 같아 마음이 찡했다. 그러다 문득 닭볶음탕에 카레 가루를 왜 넣기 시작했는지가 궁금해졌다.
“엄마, 닭볶음탕에 카레 가루 넣는 건 어떻게 생각한 거예요?”
“닭 냄새를 잡으려고 한번 넣어봤는데 너희들이 잘 먹으니까 계속 넣었지.”
아, 대단한 이유는 없었구나. 어느새 엄마는 가스레인지에 큰 냄비를 올려놓고, 닭을 익히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살짝 익은 닭에 십자로 모양을 낸 표고버섯, 꽃 모양으로 멋을 낸 당근, 동글동글 귀여운 통감자가 올려졌다. 그리고 부어진 노란색 양념장. 그런데 뭔가 허전한데?
“엄마, 원래 카레만 넣었었나?”
“아니, 고춧가루도 넣었었지. 그런데 오늘은 색깔이 안 예쁠 거 같아 뺐어.”
내가 어렸을 때 먹었던 닭볶음탕은 그게 아니었다고, 그때 그 맛을 복원해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 맛이 아니면 어떠하랴. 어차피 중요한 건 엄마의 손맛인데. 내가 더 이상 열일곱이 아니고 엄마가 마흔여섯이 아니듯, 엄마의 음식도 나이를 먹은 걸로 치면 되지.
어느새 냄비에서는 향긋한 카레 향과 고소한 고기 익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냄비를 한 번 뒤적거리더니, 닭다리를 주며 맛을 보라고 했다. “맛은 있는데, 약간 싱겁다”는 말에 엄마는 재빨리 카레와 집에서 직접 만든 맛 간장을 추가했다. 매콤한 맛을 위해 잘게 썬 청양고추도 투하. 나는 형제들 단톡방에 “엄마 닭볶음탕 하심. OO야, 너 온다고 청양고추 넣었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퇴근 후 들른다는 동생의 메시지를 전하자, 엄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언니한테도 연락했지?” “응, 근데 답이 없네. 아직 안 끝났나 봐요.” 엄마는 어느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으로 올리고당을 넣었다.
앞으로는 달콤한 맛만 있었으면
닭볶음탕을 완성하고, 엄마와 마주 앉았다. 다섯 식구가 복작대던 이 집에 이제는 엄마 혼자 산다. 집안 곳곳을 둘러보다가 불현듯 엄마의 일상이 궁금해졌다.
“엄마는 일과가 어떻게 돼?”
“음, 6시에 일어나서 간단히 아침 먹고, 8시에 수영장에 가. 교통사고 난 후부터는 수영 끝나고 물리 치료나 침 치료를 매일 받으러 가지. 갔다 와서는 점심 먹고, 좀 쉬어. 잠이 오면 잠깐 자기도 하고, 뒹굴뒹굴할 때도 있고…. 그러다 보면 저녁때가 다 돼. 흐흐흐.”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엄마가 뒹굴뒹굴이라니! 내 기억 속 엄마는 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움직였다. 뒹굴뒹굴하는 건 자식들이지, 엄마의 몫이 결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엄마가 뒹굴뒹굴 할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잠시 일상적인 대화들이 오가고, 나는 눈치를 보다 오늘이 아니면 절대 물어보지 않을 질문을 엄마에게 던졌다.
“엄마, 살다 보면 힘든 일이 많이 생기잖아. 그때마다 그걸 어떻게 이겨냈어?”
“사람이 사명감을 가지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어. 엄마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잖아. 양부모 계신 것이 무척 부러웠는데, 너희들도 아버지가 일찍 가셔서 그 아픔을 대물림하는 거 같아 미안한 거야. 그래서 ‘최소한 밥은 안 굶기겠다. 애들이 자라 본인 할 바를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내 책임이다’라는 의지로 강하게 버텼지.”
1942년에 태어나 아홉 살에 한국전쟁을 겪고, 14살 때는 식모살이를 했으며, 40대부터는 남편 없이 네 남매를 홀로 키운 엄마. 엄마는 종종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열 권으로도 부족할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아마 눈물이 반인 사연들이 인생 곳곳에 겹겹이 쌓여있을 것이다. 온종일 기분이 좋았던 엄마를 괜히 울적하게 만들 것 같아 서둘러 다른 질문을 꺼냈다.
“엄마, 그럼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걸 하면 되잖아. 하고 싶은 거 없어요?”
“공부도 하고 싶고 피아노도 너무 배우고 싶지. 그런데 지금은 건강 때문에 포기했어. 피아노를 치려고 해도 손가락에 힘이 안 들어가거든. 할 수 없는 걸 욕심내봤자 과욕이지. 아프면 주위 사람들에게 짐이 되니까, 남은 시간 동안 건강 챙기고. 조금이라도 베풀며 살고 싶어.”
“그럼 요즘에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야?”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해. 자식들 있다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은 건 아니거든.”
엄마는 앞으로 노래도 더 많이 부르고, 마음 통하는 사람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이미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구나 싶어 약간 위안이 됐다. 엄마가 앞으로도 소확행을 즐기면서 오랫동안 건강했으면. 그러면 엄마의 쌉싸름한 인생도 조금 더 달콤해지고, 윤기가 흐르지 않을까. 올리고당으로 완성된 매콤달콤한 카레닭볶음탕처럼 말이다.
1. 재료 준비(4인분)
주재료: 닭 두 마리(2kg), 감자(소) 5개, 당근(중) 1개, 파 1개, 표고버섯 5개
양념 재료: (밥숟가락 기준) 카레 가루(6), 강황 가루(1), 집에서 직접 만든 맛간장(4)(시판 중인 맛간장도 ok!),매실액(2)(없으면 설탕으로 대체), 물 3컵(1000mL), 다진 마늘(1), 다진 생강(1/4)(없으면 생략)
기타 재료: 소주 100mL, 올리고당(3), 청양고추, 브로콜리(장식용. 없어도 됨)
2. 재료 손질
1)닭고기 먼저 껍질과 기름을 제거한 후, 양념이 배도록 칼집을 낸다. 닭의 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 소주 100mL를 부어서 조몰락조몰락 주무른 후 약 20분 정도 내버려 둔다. 20분 후에 물을 적당히(물의 양은 바구니 전체에 얇게 깔릴 정도) 부어 헹구고, 채에 건진다.
2)채소 표고버섯, 감자, 당근, 파를 깨끗하게 씻는다.(닭이 소주에 취할 동안) 표고버섯은 십자 모양(+)을 내주고, 당근은 껍질을 벗겨 1cm 크기로 썬 후 꽃 모양으로 예쁘게 오린다.(귀찮으면 안 해도 됨) 감자는 껍질을 벗기고 큰 건 반 토막 내고, 작은 건 그냥 통째로 넣는다. 파는 1cm 굵기로 썬다.
3)양념 그릇에 카레 가루, 강황 가루, 간장, 매실액, 마늘, 생강을 넣고 골고루 섞는다.
3. 요리하기
1)닭고기가 타거나 냄비 바닥에 눌러붙지 않도록 물을 약간 넣은 후 닭고기를 넣는다. 센 불에 5분 정도 익힌다.(닭이 작으면 야채와 같이 바로 익혀도 됨) 이 때 뚜껑은 닫는 것이 좋다.
2)표고버섯, 감자, 당근, 파를 넣어 센 불에서 10분간 더 익히고, 양념이 잘 배도록 15분 정도 약한 불로 끊인다.
3)고기와 채소가 푹 익었다면 청양고추 몇 개(엄마는 3개를 넣고, 맛을 본 후 2개를 더 넣음)를 얇게 썰어 넣고, 2분 정도 더 끓인다. 먹어보면서 원하는 맵기로 조정한다.
4)불을 끄기 직전에 올리고당을 넣고 잘 저은 후 불을 끈다. 매콤달콤 카레닭볶음탕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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