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의나 Dec 12. 2018

[인터뷰] 달라도 괜찮고 함께라서 더 좋은 비혼 라이프

비혼여성공동체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협동조합’

전주시 완산구에 위치한 공간비비의 보금자리. ‘원더풀 비혼’이라는 문구가 쓰인 현수막이 낯선 방문객을 반긴다. 비혼이든 아니든 원더풀하기만한 인생이 어딨겠냐마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긍정하고 격려해주는 문구가 따뜻하고 반갑다. 달라도 괜찮고 함께라서 더 좋은 삶을 가꾸어가는 곳, 비혼여성공동체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협동조합’의 이야기.


*조합원들의 이름 표기는 각각 실명 혹은 별칭으로 달리 기재했습니다.

* 인터뷰 기사는 2018년 8월 기준으로, <나이이즘> 1호에 게재되었습니다.


비행의 시작,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아

‘비혼들의 비행(이하 비비)’의 첫 비행은 비혼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20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도 사라진 편견은 아니긴 하지만, 비혼을 언젠가는 결혼할 ‘미완’의 상태로 보는 눈총이 훨씬 따가웠던 때다. 당시의 결혼 적령기던 20대 후반을 넘기고 30대를 맞이한 김란이 조합원에게도 비혼은 자의든 타의든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정체성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서로의 삶을 긍정해줄 수 있는 관계가 더 절실하지 않았을까.


“당시 나이로 서른 전후 지금은 40대인 세대가, 말하자면 적극적인 비혼을 시작한 세대가 아닐까 싶어요. 여성도 고등교육을 받고 자아실현 하는 게 보편화되면서, 결혼보다는 다른 방식의 미래를 꿈꾸는 여성이 많아진 거죠. 하지만 여전히 편견이 강해서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래서 당시 근무하던 전주여성의전화(jjhotline.or.kr)에서 지역 소모임을 활성화시킬 때 ‘비혼 여성 소모임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혼하지 않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은 나를 긍정하기 위한 모임이요.” - 김란이


김란이 조합원이 평소 알던 비혼 여성들에게 소모임을 제안했고, 결혼보다는 다른 방식의 삶을 고민하고 나 자신에 집중해보자는 뜻에 동의한 6명이 모였다. 당시 김란이 조합원 외에는 서로를 전혀 알지 못했던 이들을 모아준 구심점은 밥과 여행, 그리고 공부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봄여름가을겨울 여행을 다니고, 내면의 힘을 기르기 위해 공부도 치열히 했다. 그 과정에서 비혼은 다양한 삶의 방식 중 하나일 뿐임을 깨달았다. 서로에 대한 이해도 깊게 익어갔다. 그렇게 소모임의 내실이 다져지기 시작하면서, 구성원들은 관계의 정체성을 새로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3~4년쯤 모임이 지속되면서 ‘비비’가 일상의 공기 같은 존재로 자리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보며 가족 같다고도 했는데, 원가족의 느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친구도 아닌? 우리도 어떻게 우리 관계를 규정해야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공동체 공부를 시작했죠.” - 김란이
비비협동조합원의모습 ⓒ나이이즘


실컷 안심하고 성장하며 ‘나’를 찾는 공간

‘밥심’만큼이나 ‘학심(學心)’을 중시하는 비비는 꼬박 1년 동안 공동체에 대해 공부했다. 그 끝에 내린 결론은, 다소 싱겁게도 ‘공동체 별 거 없네’다. 꼭 함께 살아야 하거나 경제 활동을 공유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라고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비슷한 시기 전주의 한 공공임대아파트에 구성원들이 하나둘씩 입주하면서 한 동네에 모여살게 된 상황도 큰 역할을 했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연대를 이어가는 비비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관심을 갖는 여성들도 많아졌다. 무작정 비비의 외연을 넓히는 게 답은 아니었기에, 구성원들의 경험을 공유하고 다음 세대 여성들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데 마음이 모아졌다. 마침 창립멤버인 김란이, 이미정, 봄봄 세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공간을 운영할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됐다. 그렇게 잘 맞아떨어진 타이밍 속에서 2010년, 비혼 여성들과 함께 하는 우정의 공간 ‘여성생활문화공간비비(spacebb.co.kr, 이하 공간비비)’가 탄생했다.


공간비비에서는 재미있는 작당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상근활동가인 김란이, 이미정, 봄봄이 특기를 살려 타로와 요가 강좌, 글쓰기 수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독서 모임과 세대별 모임, 비혼여성아카데미 등 소모임과 프로젝트도 다채롭다. 더불어 잘 사는 삶을 위해 꾸준히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갖고 실천에 힘을 보태기도 한다.


그렇게 공간이 굴러가는 시간 속에서 2016년 1월에는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협동조합’이라는 새 이름을 달았다. 그 후 무라, 아노, 달봉, 도도 등의 새로운 구성원들이 조합원으로 합류했다. 공간비비에서 사람들은 ‘비혼’이라는 뭉뚱그려진 정체성이 아니라 개별 존재로서의 ‘나’가 누구인지를 탐색하고 동시에 더불어 사는 삶을배워간다. 특히 20~30대 여성들에게 비혼 선배인 40대들을 만나는 경험은 그 자체로 든든한 ‘빽’이다. 결혼하지 않고 나이 들어가는 삶의 모델을 본 적이 없어 가졌던 막연한 불안함의 자리가,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어’라는 용기로 채워진다.


“저는 30대가 가장 불확실한 세대가 아닐까 생각해요. 비혼 여성은 더 그렇고요. 그런 저에게는 비비의 40대 분들이 롤모델이에요. ‘저렇게 살면 되겠구나’ ‘나라고 못할 게 없지 않나’라는 용기를 얻게 돼요. 그래서 비비의 40대 분들이 앞으로도 잘 살아주시면 좋겠어요(웃음). 또 저는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나 자신을 알고 내면의 힘을 키우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도 공동체가 좋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 아노

공간비비의 모습 ⓒ나이이즘


단단한 관계는 선물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공간비비가 여성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면, 협동조합은 그에 반해 문턱이 높다고도 할 수 있다. 협동조합의 특성상, 실천과 책임이 함께 따라야하기 때문이다. 대신 조합원이든 일반 회원이든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프로젝트마다 기획팀을 꾸려 주제척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누구나 따뜻한 환대와 너른 포용력을 느낄 수 있는 공간. 이는 후에 합류한 조합원들이 처음 비비를 만났을 때 공통적으로 느낀 인상이기도 하다.


“밖에서 바라보는 공동체와 직접 겪었을 때의 느낌은 정말 다른 거 같아요. 제 경우에는 비비가 각자의 독립된 생활을 존중하면서 삶의 가치와 미래를 공유하는 곳이라고 느꼈어요. 결정적으로 2년 정도 활동하면서 관찰해보니, ‘각자의 색깔로 있어도 되는 공간이구나’라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엄청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죠?(웃음).” - 도도
“맞아요. 조직생활을 하다보면 사람을 통제하고 규제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몇 번 왔다갔다 해보니 그렇지 않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어요. 그래서 편하고 좋았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점도 많았고요.” - 무라


획일성을 강요하거나 엄격한 규칙을 세우기보다 각자의 색을 존중하기. 사실 말이 쉽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비혼이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영혼의 단짝처럼 쿵짝이 잘 맞을 리는 없지 않은가. 비비의 창립멤버들 역시 서로를 안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특징을 발견할 때가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때마다, 이를 갈등으로 키우기보다는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쪽을 택했다. 비비와 새롭게 인연을 맺는 이들이 느끼는 따뜻한 환대와 편안함은, 오랜 시간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며 쌓아온 내공의 결과인 셈이다.


그럼에도 켜켜이 쌓아온 과정은 생각지 않고, 근사해보이는 결과물만 부러워하는 경우를 종종 만난다. 단단한 관계망이 ‘선물’처럼 주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획일적인 삶의 노선을 벗어나 다른 삶에 눈 돌리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대안적 관계에 대한 관심도 높은 요즘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여전히 전체주의의 산물, 혹은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유토피아라는 납작한 이미지로만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삶과 관계가 그러하듯, 공동체 역시 끊임없는 일상의 부닥침을 겪어내야 하는 관계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따지고 보면 어떤 삶이든 공동체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건데, 일반적으로 ‘공동체’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는 거 같아요. 근데 실제로 공동체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삶을 몇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어요. 직접 해보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부닥침도 많이 생기고요. 제 경험상으로는, 공동체에 맞는 기질이나 태도가 내재되어있느냐도 중요할 수 있지만 얼마나 노력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거 같아요.” - 봄봄



원더풀한 비혼을 넘어, 원더풀한 노년을 그리며

“언니, 만약에 나 치매걸리면 기저귀는 이렇게 갈아줘야 돼!” “아, 난 누가 내 기저귀 그렇게 갈아주면 싫을 거 같은데” 요즘 비비 구성원들은 이런 대화를 종종 주고 받는다. 비비와 함께 구성원들도 나이를 먹기 시작하면서, 비혼 여성을 넘어 여성 노인으로서의 삶을 상상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노후가 먼 미래의 일이 아님을 느끼기 시작한 40대 비혼들은 ‘여성노인공동체’라는 또다른 모습의 비비를 그려보곤 한다. 


경제 활동이나 노후 자금 등의 현실적 문제만큼 이들이 고민하는 지점은 노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낡아가는 몸을 부정하지 않고, 건강한 몸만 정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청할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을 키우기 위한. 그 고민의 방법은 역시나 공부다.


“노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뭉뚱그려지는 게 아니라 개개인의 노인, 여전히 나로 존중받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을 고민하고 있어요.  관련 책도 많이 읽고 있고요. 공부와 토론과 경험없이 거저 주어지는 건 진짜 하나도 없어요.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계속 공부하고 경험하면서 다음을 그려봐야죠. 구체적인 그림을 아직 그린 건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돌보며 늙어가지 않을까 싶어요.” - 김란이 


노년을 대하는 온도차는 저마다 다르지만 어떤 방식이든 비비 안에서 함께 늙어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 그 믿음의 공동체가 오래도록 잘 굴러가길 바라는 마음만은 같다. 아니다. 정정해야겠다. ‘잘 굴러가길 바라는 마음’보다는 ‘굴려가겠다는 실천적 의지’가 비비에 더 어울리는 표현인 것 같다.


인터뷰 원고를 다 쓰고 나서야, 그들에게 ‘왜 비혼을 결심했는지’ 묻지 않았음을 알았다. 아, 또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비혼을 ‘결심’한 사람도 있겠지만 비혼이 결심이라기보다는 현재 상황일 뿐인 사람도 있지 않을까. 가부장적인 결혼 제도가 싫어서 비혼을 택한 경우도 있고 사회가 결혼을 허락치 않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이 모두가 내 짐작일 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굳이 궁금하지 않았다. ‘왜 결혼해?’라고는 묻지 않는 사회에서, 한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울 비혼의 이유보다는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듣는데 더 집중하느라 그랬을까. 지금도 굳이 궁금하지는 않다. 그저 비비 사람들이 지금처럼 별일 없이, 또 별일 있더라도 함께 잘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볼 뿐이다. 다른 모습, 다른 색깔로도 잘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새로운 질문 혹은 용기가 될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안티에이징 말고 '위드 에이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