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규정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우리는 수많은 규칙과 규정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의 가르침 속에 크고 작은 규정들을 배우며 자란다. 화장실에서 이 닦는 법과 목욕하는 법을 배우고, 밥을 먹을 때는 숟가락과 젓가락의 사용법을 배운다.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해야 할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 방과 후에는 집안 청소하는 법을 배운다. 이 외에도 각종 사회적에서 약속한 규정들도 배운다. 미성년자는 음주를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배우고, 남의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는 도덕적인 규율도 배우며 자란다.
우리는 규칙과 규정 속에 살고 있다.
규정과 규칙은 중요하다.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규정과 규칙은 당시에는 다 필요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과도한 규제의 홍수 속에서 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셧다운제와 같이 불필요하게 인간과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여러 가지 제도가 생겨나는 사건도 있었다.
필자도 약 300명 이상 근무하는 조직에서 특정 업무의 규칙과 규정에 관여하는 업무를 했었지만, 항상 고민되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복장 규정은 반드시 있어야 할까? 왜 출근 시간은 반드시 9시로 정해야 할까? 문서를 만들 때 제목은 반드시 20p, 줄 간격은 5cm로 맞춰야 할까?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한 규정을 만들 때 고려해야 할 점을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보았다.
본인이 제도를 운영하고 규정을 만드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또는 조직을 이끌어나가야 하는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정도는 고려해보아야 한다.
존 어빙의 소설, '사이다 하우스'에서는 사이다를 만들기 위해 사과를 따려고 시즌마다 과수원에 모여드는 사과 따기 일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과를 따는 몇 주 동안 일꾼들은 낡은 사이다 건물에서 생활한다. 주인인 올리브는 '사이다 하우스 규칙'을 종이에 타자기로 쳐서 집 안에 붙여 넣는다. 사이다 하우스의 규칙은 아래와 같다.
술을 마셨다면 지붕에 올라가지 마십시오.
지붕에 올라갈 때 술병을 가져가지 마십시오.
이 규칙을 잘 아는 베테랑 일꾼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신경 안 쓴다네. 매년 올리브는 규칙을 걸어놓고 매년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지."
왜 그럴까?
이 규칙을 정한 올리브는 대저택에 살아 노동자들이 시원하게 휴식을 취할 곳이 지붕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지붕에서 한 잔 하는 즐거움이 일꾼들의 일상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현실과 맞지 않는 엉터리 규칙을 내걸었으므로 노동자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우회한다.
IT업계에 종사했던 사람이라면 비현실적 규정 때문에 힘들었던 프로젝트를 한 번쯤은 경험했으리라. 프로젝트의 규칙을 정하는 사람들은 프로젝트와 무관한 표준 제정 부서, 품질 부서 등이며 그들은 프로젝트의 성공과 무관한 사람들이다. 단지 어떻게 하라고 말만 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규칙을 만드는 행정 조직과 이를 실행에 옮기는 실행 조직은 힘들 때 같이 아파하고, 기쁠 때 같이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비슷한 세상에 살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공감대가 없다면 많은 사람들은 규칙을 무시할 것이다.
규칙이 유용하고 합당하다면 프로젝트 팀은 그 규칙을 따른다. 하지만 현실과 규칙이 다르다면 반드시 현실이 이긴다. - 톰 드마르코 -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례적으로 국가의 제도와 규정을 잘 따르는 민족이지만, 역설적으로 법 준수의식이 미흡하다는 평가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아직도 많은 행정조직과 리더들은 현실을 이겨보려고 많은 비현실적인 수단으로써 규칙과 규정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의 규모가 일정 규모 이상이 되면 최소한의 규칙과 질서는 필요하다. 이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하지만 현실 세계가 반영되지 않은 규칙과 제도는, 현실이 반영되지 않은 규칙은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와 같다.
R&P(Rules&Process)는 수세기 동안 우리의 문화와 생각을 지배해온 방법이지만, F&R(Freedom&Responsibility)이 무엇보다도 강조되는 변곡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법/제도로써 모든 영역을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며, F&R이 충분히 합리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F&R은 기본적으로 구성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프랑스의 레뚜알 회전교차로는 F&R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회전교차로의 특징인 신호등이 없어짐으로 인해 효율적이고 유연한 운행이 가능하다. 기존 R&P 사고방식을 적용하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교통량이 적거나 어린이 보호구역이 아닌 지역에서는 충분히 활용해 볼 만하다. 그렇지 않은가?
한 순간의 실수가 재앙으로 연결되거나 조금의 오차 없이 균일하게 대량 생산해야 하는 제조업의 경우 R&P가 정답이다. 하지만 창의성이 필요한 콘텐츠 산업의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F&R이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R&P는 레뚜알과 같은 효율적인 장치를 하나 둘 버리는 길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의 두뇌를 경직시킨다는 데에 있다. R&P만 운영하는 회사는 구성원들을 시킨 일만 하는 기계처럼 변화시킬 것이다.
많은 CEO나 리더들이 혁신이 필요하다고, 변화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기존의 R&P를 고수하는 경우도 많다. 혁신은 R&P와는 거리가 있다. 어떤 부분에서 R&P가 필요하고, 어떤 영역에서는 자율을 허락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실수는 혁신 사이클의 주요 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R&P는 더 이상 정답이 아니다. 교향곡은 당신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지휘자와 악보에는 더 눈을 두지 말라. 그보다는 재즈 밴드를 결성하라. 음악이 들리기 시작하면 계속 집중하라. 문화는 한 번 만들어놓고 모른 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넷플릭스에서 우리는 우리 문화를 꾸준히 논의하고 그것이 계속 진화하기를 기대한다. 혁신적이고 빠르고 유연한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긴장을 조금 늦출 필요가 있다. 꾸준한 변화를 환영하라. 혼돈의 가장자리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라. 교향악단을 조직하지도, 악보를 주지도 말라. 재즈 연주에 어울리는 무대를 만들고 즉흥 연주에 능한 직원들을 고용하라. 그런 조건들이 하나로 모일 때, 무대에서는 멋진 음악이 흘러나올 것이다.
- 규칙 없음, 리드 헤이스팅스 -
이 이야기는 당연한 것처럼 들릴지는 몰라도 우리는 꽤나 자주 평균의 함정에 빠지곤 한다. '평균'이라는 단어는 2차 산업혁명 이래로 하나의 원칙처럼 여겨져 온 단어이기에 이 기법을 활용하는 것은 매우 매혹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교육시스템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는 그 유명한 테일러 중심 사회의 표본이다. 학생, 부모, 교육기관, 정부기관 모두 일차원적 등급 매기기에 가학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모든 학생과 똑같이 하되 더 뛰어나도록 강요하고 있다.
왜 인간의 재능은 모두 다른데 하나같이 국영수를 공부해야 하는가? 수많은 기성품을 제조하는 공장을 닮아 있는 국가의 교육제도(회사도 마찬가지다)를 개선할 방법은 없는 걸까? 개개인의 특성과 적성을 살리는 교육정책을 수립한다면 조금 더 한국이라는 국가가 경쟁력을 갖추게 되지 않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면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추후 더 깊게 다룰 것이다.)
정말 능력 있고 뛰어난 사람이라면 숫자 이면에 있는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즉 인간적인 부분을 이해하지 않고 숫자만 고집하게 되면 위에서 언급한 사이다 하우스의 올리브와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맥락을 잘 짚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의 도발과 미중 갈등 등의 국제정세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경제규모와 군사력만으로 보면 러시아의 이번 전쟁과 도발은 절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 1위 부자로 추산될 정도로 막대했던 푸틴의 재산, 그리고 과거 소련 시절의 부활을 꿈꾸는 그의 야망, 전 세계는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는 대격변의 시기에서 전통적인 에너지 자원 부국인 러시아의 현재 상황을 놓고 보면 어떤가? 푸틴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가?
본인 자신이 제도와 규칙을 정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그만큼 그 제도를 운영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충분한 고민을 해야 한다. 현실성 없고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도와 규칙은 당사자 개개인을 넘어 조직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으니까.
(p.s)
위계 조직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꾸려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필자도 정작 위계 조직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