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꿈에 엄마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젊고 미소 짓는 모습으로,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어릴 적 단란했던 우리 가족들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딸에게 엄마는 평생 친구이자 언제든지 나의 편이 되어줄 든든한 지원군인 것이다. 아버지는집이었다. 우리 가족을 모두 품을 수 있는 태산이었다. 나를 지켜줄 지원군도 없이 무너져버린 산 아래 나는 홀로 남겨져 버렸다. 망막함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 둘 때조차 없었다.
공허를 깨는 핸드폰 벨소리.
“선생님! 힘드시겠지만, 엄마가 축 처져 있으면 안 돼요 아이 생각해서라도 기운 내셔서 교육도 다시 나오시고 홍보도 다시 해야죠!”
팀장님이 전화를 했다.
‘나도 한 아이의 엄마이자, 내가 지켜야 할 가족이란 울타리가 있었다.’
요즘 미움도 정에 다른 이름인가 하는 생각이 문뜩 든다. 뼛속깊이 파고들었던 미움도 짜장면 먹다 무신경하게 툭 덜어 건네는 짜장면 몇 가닥이 담긴 그릇에서, 마트에서 한가득 장보고 장바구니 들고 나오는 걸, 지나가는 행인인 양 쓱 뺏듯이 무심히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는 건 나도 나이 들어 드는 측은지심인 건지, 아님 지금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닌 듯 공허에서 드는 착각인지, 남편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내게도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랑이라 이름보다 더 끈끈한 가족이란 이름으로 맺어진 울타리가 있었다. 그것이 스물네 시간이 야속할 정도로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나의 이유이다. 나의 엄마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일주일 후, 나는 다시 공부방 문을 열었다.
공부방 아이들은 절반보다 더 줄었다. 나는 생각했다. 나의 초심, 그동안 많은 회원들과 과목수로 가르친다기보다 공부방 회원모집, 성장에만 취중 하다 보니, 본디 충실해야 하는 가르침보다 유명브랜드의 강압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국의 방침에 따라가기만 했었던 건 아닌지 곰곰이 반성했다. 늘 가르치며 배운다는 나의 본디의 목적은 뒤로한 채 말이다.
학생들이 줄어드니, 그동안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미안함이 눈에 들어오고, 내가 학원강사로 일하면서 느꼈던 가르치며 배우는 것에 대한 보람 뿌듯함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공부방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딸아이의 공부가 공부방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동안 내가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지 잠시의 쉼표로 다시금 나를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공부방은 스스로를 재점검하기 시작했다. 물론 홍보도 다시 시작했다. 처음 시작했던 유명브랜드의 이름이 아닌 당당한 나의 이름을 건 공부방으로 말이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방법, 소그룹 공부방으로 나의 무기 꼼꼼함과 섬세함으로 학생들 레벨에 맞는 일대일 맞춤 수업, 맞춤교재로 어머님들과 상담으로 조율해 가며 수업하는, 그동안 쌓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로 승부를 걸기로 했다.
공부방 시작하며 지금까지 함께 나를 믿고 따라준 학생들과 어머님들이 고맙게도 지금까지 함께해주고 있는 이유 또한 내가 믿고 가지고 가려는 이런 이유일 거라 생각했다.
스스로 현명해져야 하며, 편해지려는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늘 공부해야 하며, 깨어있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성장시켜 주는 요인일 것이다. 그 어떤 힘든 일이라도 견디고 나면 늘 성장해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런 나를 성장시켜 주는 가장 큰 원동력은, 늘 나만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나의 딸아이이다. 그래서 엄마는 늘 힘들어도 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