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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 Aug 14. 2023

11화. 밀려오는 위기와 좌절 그리고 나를 돌아보다.

7년 만에 다시 당당한 워킹맘으로... 워킹망 출근기

하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구도 비껴갈 수 없었던 큰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당분간 쉴게요!”

“저도요...”

“저도요... 아이 보내는 게 겁이 나네요.”     



전 세계를 뒤덮은,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생소한 병에 지구는 공포에 휩싸였고,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극도로 서로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따로 과외를 하는 학생이 수업 중 한 말이 우리가 얼마나 큰 두려움과 공포에 싸여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선생님, 코로나에 걸린 사람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기만 했는데요. 글쎄 옆에 같이 있던 사람도 바로 코로나에 걸렸데요.”     


우리는 만나는 걸 꺼렸고, 자신의 가족조차도 한 번의 기침에도 경계의 눈빛으로 서로를 봐야 했다. 북적대던 우리 아파트 상가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고, 거리는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차량으로 학생들을 바삐 실어 나르던 근처 학원들은 정부의 발표에 따라 학원 문을 닫기와 열기를 반복하며 간신히 운영을 이어가고 있었다.     


거대 학원이 닫기와 열기를 반복하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면 집에서 소규모로 운영하는 나의 공부방은 상가 학원들보다 더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연이어 오는 휴회 문자에 정신을 차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선생님 당분간 쉴게요!”

“저도요...”

“저도요... 아이 보내는 게 겁이 나네요.”     


소개로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학생조차도 그만두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계속되는 뉴스 보도에 되도록 안전한 집에 머물라는 정부방침을 연신 보도하고 있었다. 뉴스보도를 들을 때마다 공부방 운영 걱정나의 일터가 딸아이가 머무는 집인 탓에 딸아이의 건강 걱정까지 해야 하는 이중 고통에 나 또한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평소 예민함이 극에 달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계시던 어머님이 결국 그만두겠다는 통보를 해다. 친구가 그만두니 같이 온 학생까지 그만둔다는 얘기를 다. 공부방 학생의 3분의 1 정도 빠져나갔고, 곧이어 나의 과목수도 반토막이 나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의 학생들을 모집하는데, 2년 가까이 걸렸다. 그러나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걸린 시간은 전화 한 통화로 문자 한 통으로 몇 초, 몇 분이면 되었다.      


그동안 공부방 홍보한다고 아이들 학교 등교하는 날, 하교하는 날, 아파트 차량 정류소마다 거리마다 전단지 들고나가 홍보를 했었고, 아파트 1층부터 20층까지 대단지를 두 다리로 뛰어다니며 장장 6개월가량 미친 듯이 전단지를 돌리며 거둔 성과였건만, 그 모든 것이 달랑 전화 한 통화로 한 번의 문자 한 통으로 너무 쉽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모으는 건 어렵지만 쓰는 건 쉽듯, 어렵게 일궈온 것들이 무너지는 대는 단지 몇 초, 몇 분이면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하염없는 기다림...

묵묵히 내 자리에 있는 거 피하지 않고 부딪쳐보는 것뿐, 달리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코로나로 온 나라가 들썩여도 나는 공부방 문을 열고 묵묵히 내 수업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나의 노력은 무기력했고, 진정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빠져나가자 남은 아이들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선생님, 이러다 공부방 문 닫는 거 아니에요!”     



공부방 시작하고 처음으로 일주일을 쉬었다.   

불행은 늘 연이어 몰려온다.

“여기 응급실이다.”

“응급실! 무슨 일이야. 오빠!”

“아버지가 수면제를 과다복용하셔서 응급실에 실려오셨어.”

“뭐!!! 아빠가...”     


재작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홀로 계셨던 아버지. 도우미아주머니가 매일 오전에 식사나 빨래를 챙기려 들리셨지만, 그래도 외로움을 참기 힘드셨는지, 밤에 잠이 오지 않으신다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응급실로 실려가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확진자가 창궐하고 있는 상황, 엄격해진 출입자 통제로 응급실 면회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거의 2년 만의 일이다. 알 수 없는 것이 부부의 관계요. 또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맞벌이로 바삐 일하셨던 엄마와 아버지는 그다지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릴 적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 엄마에게 술주정을 하셨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말리기 바빴다. 그 모습이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부모님의 모습이다.   

   

하지만, 엄마는 어디를 가든 자신보다 아버지를 제일 먼저 챙기셨다. 돌아기시기 전 치매가 좀 있으셨을 때도 아버지의 건강은 잊지 않으셨다. 말라가는 아버지가 안쓰럽다며 자신의 건강보다 남겨질 아버지를 걱정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일한다고 우리를 모두 태어나자마자 할머니에게 맡겨 할머니 손에서 자라게 했다. 그러나 엄마에게 원망스럽다고 말하지 못한다. 평생 시장에서 고단하게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일찌감치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 있는 엄마와 아버지도, 늦게까지 결혼도 안 하고 버티는 딸이 처음에는 눈에 가시었다가 나중에는 항상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짐처럼 무거웠을 것이다. 때론 자신처럼 나이 들어가는 자식을 보며 아직 남아있는 숙제처럼 밀려오는 부담감도 컸을 것이다. 나의 의견이나 생각은 고려치 않고 말이다.     

 

나는 연애도 하지 않았고, 일하는 학원수업이나 내 공부하는 것 외에 글 쓴다고 늘 골방에 틀어박혀 세월이나 축내고 있는 늙은 딸이었다. 모아둔 돈이 있는 것도 아니요. 번듯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 제 앞길도 찾지 못한 딸이 걱정되는 건 어쩜 당연하지 않나 싶다. 애물단지도 이런 애물단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여느 아버지처럼 다정스레 하나밖에 없는 딸의 마음 하나 헤아려주거나 어루만져주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와 의견충돌로 다툼이 잦았고, 더 이상 아버지랑 싸움하는 것이 내게도 지치는 시간들이었다.      


내가 오랜 시간 꿈꾸었던 기회가 왔을 때도 잡지 않았다. 나의 오랜 지침으로 스스로에게도 쉼표가 필요했었다. 결혼과 동시에 아버지를 피해 오랜 시간 버텼던 나의 꿈을 뒤로하며 달아나듯 집을 나왔다.      


불행은 늘 연이어 몰려온다.

오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그 원망의 대상사가 사라지니, 원망할 곳조차 없었다.

미움도 미움의 대상이 있어야 미움이 존재하더라. 미워해야 할 존재도 원망해야 할 존재도 사라지니 모두 그리움이 되었다.     


엄마 몰래 군것질하라고 슬쩍 건네주던 용돈, 늘 퇴근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내 생애 처음 지었던 동요 동시의 제목이 ‘아빠생각’이었다. 그리고 어릴 적 버스정류장에서 ‘아빠’하고 뛰어가는 나를 맥코트 흩날리며 반가움에 뛰어오시던 그 젊은 날의 멋쟁이 아버지가 떠올랐다.      


삶의 부피를 늘리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에서 배운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 중에서>     


큰 위기에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버티고 있던 내게 아버지는 그렇게 잠시 쉼표를 주었다. 그동안 공부방 일에 육아에 교육에 살림에 스물네 시간이 야속할 정도로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나를 잠시 되돌아보게 했다. 이제 친정이라고 전화할 곳도 찾아갈 곳도 없다. 우편함에 덩그러니 꽂힌 주인 잃은 우편물을 보니 울컥했다. 삶이 인생이 참 허무하다.     


공부방 시작하고 처음으로 일주일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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