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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성원 Mar 01. 2017

르 코르뷔지에②

구태를 파괴하는 혁신가

"장식예술은 죽었다. 현대 도시계획은 새로운 건축과 더불어 태어난다. 거대하고 격렬하고 원초적인 진화가 과거와 절교했다."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중에서 믿는 것이 더 낫다. 행동하는 것과 와해되는 것 중에서 행동하는 것이 더 낫다."

르 코르뷔지에의 책 <도시계획>에 담겨 있는 이 두 문장은 르 코르뷔지에가 만들어낸 혁신의 정신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코르뷔지에는 당시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혁신을 해냈다.

 코르뷔지에의 등장 이전까지 유럽 사회는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꿈틀대던 때였다. 건축은 다양한 형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르누보(Art nouveau)'다. 빌 리제베로는 <서양 건축 이야기>에서 "이전까지 '양식'이란 그저 과거 양식을 재현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1890년대의 진보적인 양식주의자들 사이에는 근대건축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양식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고 말한다. 아르 누보의 양상으로 등장한 건축가 중 하나가 바로 스페인의 안토니 가우디다. 가우디는 이때까지 이어져 오던 전통적인 양식을 파괴하고 콘크리트를 활용해 흐르는 듯한 자유로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가우디의 걸작으로 꼽히는 바르셀로나의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 성당. 사진=위키미디어 커몬스

 하지만, 아르누보의 한계는 뚜렷했다. "(아르누보의) 수공예성은 좋게 말한다면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나쁘게 말한다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북돋는 사회를 진정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닌 한낱 상품이 되어 버렸다."(리제베로, <건축의 사회사>)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산업혁명이 있다. 18세기 후반 증기기관과 기계화는 사람들이 도시로 모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이던 농업은 기계화의 충격으로 고용능력을 잃어버렸다. 대신 도시에서는 새로운 산업의 출현으로 고용능력이 확대되었다. 자연히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이동이 대거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도시는 밀집도가 심각해지고, 그 수용능력을 확대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떠안고 있었다. 아울러 철근 콘크리트라는 새로운 건축기법이 등장한 때이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연달아 겪은 뒤, 도시와 건축을 구성하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사회적 과제였다. 이 시대적 과제를 철학으로 무장하고 등장한 인물이 바로 르 코르뷔지에다. 1914년 세계대전이 터진 뒤 도시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당시의 중요한 과제는 많은 집을 빠르게 짓는 일이었다. 코르뷔지에는 그 과제에 대한 고민 속에서 '돔이노(dom-ino; dommus+innovation)) 이론'을 내놨다. 돔이노 시스템이란 얇은 바닥 판(슬라브)과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 그리고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을 집의 구조로 고안된 간편하고 실용적인 건축의 새로운 방식이다. 돔이노 시스템은 아마도 건축 역사상 처음으로 집을 '열린 시스템(open system)'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플랫폼'이었다고도 평가 받는다.


 

돔이노 시스템. 사진=르 코르뷔지에 재단


"집은 주거를 위한 기계다(House Machine)"

 수백년 간 이어져 내려오던 건축에 대해 도전장을 내민 이 일성은 코르뷔지에 이외의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거대한 신화를 깼다. 건축은 어느새인가 인간과 멀어진 채 '권위와 지배를 위한 기계'로 작동하고 있었다. 신과 왕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을 자극하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사실 산업혁명이 촉발한 기계시대의 첫자락에 어울리지 않았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도시가 빠르게 확장되어야 하는 데에도, 세계대전 이후 빠르게 도시를 복구하는 데에도 당시의 건축 신화는 인간들의 삶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코르뷔지에는 이 금기를 깨며 "건축은 르 코르뷔지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 대표작이 바로 사보아 저택(Villa Savoua, 1929년)이다. 그는 돔이노 이론과 함께 이 주택을 지으며 건축의 5원칙을 정립했다.

빌라 사보아 사진=크리에이티브 커몬스 https://en.wikipedia.org/wiki/File:VillaSavoye.jpg
①필로티=흐린 날이 많은 유럽 날씨에 환기가 잘 안 되는 중정형 전통 주거의 단점을 보완하고 주거층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건물을 지면으로부터 띄우기 위해 필로티를 사용했다.
②옥상 테라스=1층 필로티로 인한 면적 손실을 옥상에서 만회하고 일광욕을 즐기며 휴식장소로 활용한다.
③자유로운 평면=건물의 하중을 내력벽이 아닌, 기둥이 감당하도록 해 단절성, 폐쇄성, 고착성의 상징인 벽이 연속성, 개방성, 가변성을 보증하는 칸막이로 바뀌게 했다. 근대적 공간성을 가능하게 했다. 위층과 아래층의 구조가 같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④수평창=자유로워진 파사드에 창을 수평적으로 길게 내어 수직적 창보다 더 자연광을 많이 받아들이고 파노라마적인 전경을 즐길 수 있다.
⑤자유로운 파사드=건축가가 마치 그림을 그리듯 파사드의 원하는 곳에 문과 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자료출처=르 코르뷔지에 전(예술의 전당)
모듈러. 그림=르 코르뷔지에 재단 http://www.fondationlecorbusier.fr/

 그는 인간의 스케일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거대한 규모의 교회 건축만 바라보던 건축가들의 세계 속에서 그는 '사람이 살기에 가장 적당한 크기의 규모는 무엇일까?'라고 생각했다. "과거 신들을 위한 건축, 즉 거대하고 황홀하도록 아름답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위협적인 건축이 아닌, 실제로 사람이 살기에 편안한 공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르 코르뷔지에 전)했다.

 코르뷔지에가 고안해 1947년 미국 디자인협회 회의에서 처음 발표한 '모듈러' 이론은 그렇게 나왔다. 사람의 스케일, 사람 몸의 치수를 기준으로 적당한 규모의 건축을 고안해 인간이 생활하기에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비율을 창안해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코르뷔지에는 모듈러 이론을 적용해 현대식 아파트의 모태인 유니테 다비타시옹(1945-1952)을 지었다. 콘크리트 구조의 대규모 공동주택이 등장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유니테 다비타시옹 사진=르 코르뷔지에 재단

구시대를 완전히 접고 새로운 시대를 연 코르뷔지에는 새로운 신화가 되었다. 그의 철학은 사실, 그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취지가 있었다. 하지만 신화가 된 그의 건축은 취지는 무시된 채 복제되기 위한 하나의 견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후의 건축가들은 그저 그의 결과물만을 따라가다 전통을 무시하고 직선으로 모든 것을 갈아 엎어 버리는 모더니즘의 파괴적 속성만을 복제해댔다.

그는 "당나귀처럼 중세의 사람들은 울퉁불퉁한 길이면 울퉁불퉁한 대로, 자갈길이거나 진흙탕길이면 그 길 모양대로 그럭저럭 지나갔"(<도시계획>)던 과거와 달리 반듯한 길을 내자고 주장한다. 그는 "현대도시는 직선에 의지하여 유지되고 있다. 건물, 하수구, 배수구, 차도, 보도 등의 건설. 교통은 직선을 필요로 한다. 곡선은 비용이 많이 들고 힘들며, 위험하다"고 강조했다.(<도시계획>)

 그렇게 르 코르뷔지에가 문을 연 모더니즘도 하나의 신화가 되어 버렸다. 평평한 슬라브 지붕이 아닌, 박공 지붕으로 집을 짓지도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의 목표 중 하나는 덕지덕지 이어진 박공으로 대표되는 빅토리안 양식의 집을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기의 가볍고 청명한 공기 속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역사의모든 방해물과 심리적 짐짝들을 없애는 것이었다."(마이클 폴란, <주말 집짓기>)

 르 코르뷔지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만일 우리가 집에 관한 모든 죽은개념을 마음 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린다면, 우리는 ‘주거를 위한 기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모더니즘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뾰족지붕은 그 자체로 ‘죽은 개념’이었다. 박공 아래에 자리한 공간인 다락 역시도 못지않게 유해한 개념으로 간주되었다. 돔이노 시스템이 적용된 '기하학적 큐브'만이 과거라는 망령을 내쫓을 수 있었다.

바나 벤츄리 하우스. 사진=위키미디아 커몬스
 포스트 모더니즘의 문을 연 로버트 벤츄리(Robert Venturi)는 그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고, 모더니즘 신화 속에 갇혀 있던 모든 건축가들을 자유롭게 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체스트넛 힐에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지은 집에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거대한 박공지붕을 올렸다. 1964년 완공한 바나 벤츄리 하우스(Vanna Venturi House)는 포스트모더니즘 건축 혁명의 서막을 알린다. 1964년 작성한 벤츄리의 글에 따르면, 단일 경사 지붕이 조금씩 다시 생겨나고는 있었으나, 파사드 자체를 “두 경사가 직접 만나 페디먼트를 이루는 형태”로 디자인하는것은 “금기를 어긴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가 고안한 거대한 전면의 박공은 “너무 익숙하고 고전적이면서도, 너무 특이하고 터무니없어 보였다”고 한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표현인가. 벤츄리의 박공이 그저 “너무 익숙하고 고전적”이기만 했다면 이 건물은 현대 건축물로 인정받을수 없었을 것이다. 1964년 한 해에만 해도 수백 수천 채의 뾰족지붕 주택이 지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할때, 바나 벤츄리 하우스는 빈센트 스컬리 같은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데 실패한 채 값싼 부흥 운동을표방한 그저 그런 시골 건물이 될 소지도 다분하였다. 즉, 현대건축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특이하면서 터무니없는” 것이되어야 했고, 벤츄리 하우스는 아주 확실하게 그러했던 것이다. 벤츄리는 박공을 만들고 싶어했다. 모더니즘을 모욕하기 위해 이처럼 훌륭한 무기가 어디 있으랴? 박공을 크게 과장하면서도 속을 비워 내, 박공이 박공 그 자체를 표현하는것이 아니라 박공에 대한 코멘트로 여겨지게끔 처리하였다. 벤츄리 본인이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형식으로 만들어 낸 페디먼트가 일종의 기호이자 재현으로써 받아들여지도록”한 것이다. 벤츄리가 자신의 지붕을 ‘상징’이아니라 ‘기호’로 지칭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체스트넛 힐에 세운 그의 작품은 건축에 새로운 목소리를 부여했을 뿐 아니라,건축적 상징에서 건축적 기호로의 전환을 이루어 냈다. ‘기호’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벤츄리는 기호학적 어휘를 건축에 도입하게 되는데, 이러한사고방식은 모든 문화적 활동이 언어처럼 일련의 기호 체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기호학자들과그들의 뒤를 이은 구조주의자들은 이 용어를 세기말에 등장한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Ferdinandde Saussure에게서 차용하였는데, 소쉬르의 이론은 언어학 분야를 초월하여 문학이론과사회과학, 예술비평 뿐 아니라 로버트 벤츄리의 활약으로 인해 현대 건축에까지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발휘하게된다.(<주말 집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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