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 나온 것은 당구공 덕분이었어요.
1860년 무렵 아프리카코끼리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 일로 당구공 재료로 쓰이던 상아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어요. 그러자 미국 당구 업자들은 상아를 대체할 물질을 개발하는 자에게 1만 달러의 상금을 지급한다는 공모에 나섰어요. 하야트란 인쇄업자가 상금을 탈 욕심으로 동생과 함께 톱밥과 종이를 풀과 섞어 당구공을 만들려다, 우연히 니트로셀룰로오스와 장뇌 (녹나무를 증류하면 나오는 고체 성분)을 섞었을 때 매우 단단한 물질이 된다는 것을 알아냈죠. 천연수지로 만든 최초의 플라스틱 ‘셀룰로이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어요.
천연원료를 사용하지 않고 만들어진 최초의 합성수지로, 단단하고 절연성이 좋아 부식되지 않아요. 여러 가지 첨가물을 넣고 가공하면 다양한 특성의 복합재료가 만들어지고, 열과 압력으로 성형한 뒤에는 다시 열을 가해도 물러지지 않아요. 값싸고 내구성도 뛰어난 우리 원리는 간단해요. 서로 연결된 수천 개의 분자 사슬, 즉 고분자로 이루어져 다양한 형태로의 변형이 가능해요. 나의 탄생은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유일하게 빠뜨린 것이라 말했고, 그리스어로 성형하기 쉽다는 의미를 지닌 플라스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어요.
플라스틱은 서로 가지려고들 아우성이었죠. 영구적으로 활용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인간은 없었으니까요. 나는 내가 영원히 소멸하지 않고 세상 곳곳에서 쓰임 받는 플라스틱으로 세상에 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우리는 생활 주변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포장용 비닐봉지, 플라스틱 음료수병, 전선용 피복 재료 등등… 광범위하게 소비되는 플라스틱 폴리에틸렌(PE)으로도 만들어졌어요. 이후에 만들어진 합성 섬유 나일론은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질긴 기적의 실로 불렸죠. 미국 듀퐁사의 ‘월리스 캐러더스’라는 사람은 나일론 스타킹을 만들어 첫 판매 당일 미국 전역에서 400만 켤레의 매출액을 올리기도 했어요. 방수, 방풍 기능 덕에 낙하산과 텐트 등 군용 제품과 어망이나 로프 산업용 제품 제조에 널리 사용되기도 했죠. 형태는 물론 색도 자유롭게 변형 가능한 특징과 같은 재질도 다른 색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패션 분야에서 가장 관심을 가졌어요. 다양한 색감을 낼 수 있는 저렴한 소재였기에 폴리에스틱의 등장으로 대량 생산 가능해진 패션 산업은 인간 소비의 상징이 되어 세계 경제 성장을 주도했어요.
나는 세상 속 인간에게 계획도 예상도 할 수 없는 여러 도구로, 용도로 급속도로 스며들고 쓰이게 되었죠. 내가 존재하는 그곳이 내가 머물 곳이었고, 내가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사람과 돈이 모여들었어요. 나는 이 세상과 인간들을 조금씩 내게 길들이기 위해 슬금슬금 구석구석 퍼져나갔어요. 비록 ‘여자’ 당신보다 늦게 세상에 나왔지만, 이 세상이 없어진다 해도 나만큼은 존재하고 있을 거예요. 내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승자가 될 거예요.
나는 남자 때문에 세상에 나오게 되었어요. 내 주인은 천지를 창조한 전지 전능자예요.
빛과 어둠을 만들어 낮과 밤을 나누고, 궁창(穹蒼)을 나누어 하늘과 바다 땅을 만들었어요. 그 땅이 각기 종류대로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고,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만들었어요. 세상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어 놓고 가장 마지막에 남자를 만들었죠. 창조주는 남자의 독처(獨處)함을 좋게 여기지 않아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고, 남자 신체 일부분, 아교섬유가 포함된 유기질 성분이 전체 35%를 차지하고 칼슘 등의 무기질 성분은 45%, 수분 20%로 구성된 부위를 떼 내어 나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어요.
나는 당신처럼 특별한 이름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어요. 내가 만들어지는 순간, 세상을 통틀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닌 유일한 존재 여자가 창조되었으니까요.
우리가 사는 고요하고 청명한 '헤덴(Heden)’에는 동산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강의 투명한 물소리와 수풀 사이사이 공기 흐름을 타고 사뿐사뿐 스치는 바람 자취에 이름 모를 각종 새가 지저귀는, 언제나 클래식이 넘실거려요. 곳곳에 펼쳐진 과실나무 열매는 햇살의 환희 속에서 클래식을 타고 무르익고, 짝을 이룬 수십 종의 생명체들은 클래식을 느끼며 사랑을 나누어요.
남자와 나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동산에서 서로 아낌없는 사랑을 만들어 가면 됐어요. 우리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도 수치스럽지도 않았어요. 내 머릿결이 실바람을 타고 즐거웠고, 내 눈 속에는 황홀함에 젖은 그의 모습이 담겨 내 콧속으로 그의 향기가 전해졌어요. 도톰하고 탱글탱글한 입술을 맛있게 터치하고, 촉촉해진 입술이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내 양 볼은 석류 열매처럼 볼그스레해졌어요. 수줍어 들어내지 못하는 양쪽 귀도 그는 잊지 않고 입맞춤해 주었죠. 가늘고 긴 목선을 타는 그의 입술 촉감을 느낄 때 그의 손은 어쩔 줄 몰라하는 내 어깨를 끌어당겨 폭 안았어요. 그의 손은 다시 몽글탱실한 풍만해진 젖가슴을 정성스레 빚고 빚었고, 그의 입술은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튀어나온 핑크빛 유두를 삼켰어요. 볼록 튀어나온 아랫배에 밀착되어 오는 그의 강렬한 몸짓은 내 육신의 도파민을 활성화하고, 내 영혼의 엔도르핀 분비를 촉진시켰어요. 우리가 하나가 되는 순간 동산 북풍이 일어나고 남풍이 고개를 들어 온 세상에 우리 하나 된 기쁨의 소리는 클래식의 클라이맥스로 덮여요.
여자는 사랑의 결정체(結晶體)라 할 수 있어요.
창조주는 우리에게 세상 모든 것의 이름을 짓게 했고,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셨어요.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랍니다.
내 이름은 영희예요.
플라스틱처럼 개발되지도 않았고, ‘여자’ 당신처럼 전지 전능자로부터 창조되지도 않았어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몰라요.
쫀득쫀득, 물컹물컹, 몰랑물렁 좁지만 안전했던 방에서 갑자기 떠밀려가는 것 같았어요. 어떤 통로를 지나 ‘쑥~’ 빠져나온 곳은 시원하고 눈부신 곳인 것 같았는데, 갑자기 느닷없는 소란으로 눅눅한 서늘함이 감싸는 것도 잠시 추위가 밀려들었어요. 내 몸이 들렸다 놓였다 흔들리고 폭 안겼다 놓이고… 불안정한 변화가 반복되었어요. 고함과 울음소리, 뭔가 닫히고 두들기는 소리, 어지러운 움직임… 그리고 내 입에 닿는 몰랑한 촉감… 그것을 물고 빨며 잠들었고, 시커멓고 딱딱한 좁은 곳에 놓였어요.
내가 머물렀던 보육원 원장 선생님 말씀으로는 시장통 채소 쓰레기 더미 아래 종이상자 속에 탯줄도 마르지 않은 갓 태어난 아기가 버려져 있었다고 했어요. 동트기 전 지나가던 행인이 길고양이가 핥고 있는 아기를 보고 근처 파출소에 신고했고, 병원으로 옮겨져 겨우 살았다고 했어요. 보호소에서 5살 때까지 자라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다고, 그저 세상이 보이고 느껴지는 순간 나는 5살 아이 영희로 불리고 있었어요.
나는 당신들처럼 특별하고 유일하지 않았어요. 내가 사는 보육원에는 겉모습은 다르지만,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아이들이 많았으니까요.
나보다 두 살 많은 철수 오빠는 대로변 나무 아래 쓰레기 더미에서 환경미화원에게 발견되어 보호소에서 보육원으로 왔고, 미숙 언니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로 70cm, 높이 60cm, 깊이 45cm, 규모로 된 베이비박스에 넣어져 이곳으로 왔다고 했어요. 내 친구 명자는 공공화장실 병기에 버려져 죽을 뻔했지만, 병원에서 여러 가지 치료를 받고 겨우 살아나 이곳으로 오게 되었고, 지연이는 한겨울 인적 없는 야산에 버려져 등산객에게 발견되어 이곳에 오게 되었어요. 지연이는 그때 신체 리듬에 문제가 생겨 한여름에도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한기(寒氣)를 견딜 수 있어요. 우리는 모두 어떻게 무엇을 위해 만들어져 분리된 생명이 되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비슷할 것 같은 우리끼리 사는 보육원 담장 안 일상은 정해진 속도로 움직이는 시계 소리와 같았어요. 모두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음식을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나누어 먹었고, 같은 옷을 돌려 가며 공급받아 입었어요. 힘센 아이가 약한 아이를 괴롭혀 얻는 것은 일회적 만족감이고, 약해서 손해 보고 착취당하는 것도 잠깐의 결핍을 느끼는 것이 전부예요. 그래서 우리의 다툼과 소유욕은 그저 좁은 담장 안 세상 반복된 무료함을 견디는 잠깐의 일탈에 불과했어요. 담장 안에 있는 어떤 것도 혼자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까요.
아! 나 혼자만의 것이 하나 있긴 했어요. 보육원 구석 창고 뒤편에 콘크리트 벽돌 담장을 대신한 무성한 가시넝쿨이 있었어요. 사나운 가시가 무섭게 돋아 노려보고 있는 얽히고설킨 가시넝쿨 속에 피어 있는 하얀 꽃 한 송이... 만질 수도, 물을 주어 돌볼 수도 없었지만,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그곳에 홀로 피어 갇혀 있는 꽃을 찾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어떤 날은 가시넝쿨 사이사이로 드리우는 햇살에 눈이 부시도록 화려해 보이는 꽃을 보며 기뻤고, 어느 날은 비 눈물 무게를 머금고 있는 꽃잎이 떨어질까 봐 마음을 졸이기도 했어요. 가시넝쿨 속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는 오직 나를 위해 사시사철 존재하는 것 같았어요.
우리는 기다리는 미래도 같았어요. 이 담장 안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담장 밖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때를 기대하죠. 기대하고 기다렸던 첫 세상은 학교였지만, 학교에 나가면서 나는 혼란스러웠어요.
사람들은 내게 어디서 어떤 존재로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고, 어떤 사람과 어떻게 사는지를 궁금해했어요. 그런 관심이 싫지 않아 내가 사는 보육원 세상을 말해 주면, 자기들 세상으로부터 분리하려는 경계선을 구축하기 위한 기초 공사를 시작하려는 태세로 변해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그 경계선을 기웃거리지 않아도, 학교 공간 학습에서 얻는 성취감과 나와 다른 관계 속에서 습득되는 생존 법칙을 익힐 기회를 얻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고등학생이 되어 아르바이트하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이력서에 적힌 내가 사는 보육원 주소를 보고, 보육원 원장님의 신원 보증과 학교 담임 동의서를 받아 오라고 했어요. 성인이 되어 취업할 때도 경찰서에 가서 범죄 기록이 없는지 확인서를 받아 오라고 했죠. 나 같은 존재들 대부분은 성인이 되어 부정적 일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혹은 앞으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는 편견은 좋지 않은 기분 정도가 아닌, 분리된 존재임을 반복적으로 되새겨 주는 것 같아 슬펐어요.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귀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많은 돈을 벌어 주는 개발품이 아니라서, 내 용도와 쓰임을 스스로 증명하며 기회를 얻기 위해 살아 내야 했어요. 나는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냥 오늘을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