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사랑의 결정체라고요? 사랑의 결정체라는 덩어리는 우리처럼 견고하고 끈끈하게 얽혀 있지 않은 것 같았어요. 내가 만난 ‘여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들은 정체 모를 괴물의 먹잇감이 되는 순간 연하고 부드러운 백색 두부가 뭉개지듯, 결정체 덩어리는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렸어요. 스스로 자기 용도와 쓰임을 증명하면 기회를 얻을 수 있나요? 내가 만난 영희 당신처럼 이름을 가진 존재들은 자기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기회를 얻으려 무척 노력했지만, 괴물로 인해 허물어진 그녀들의 삶은 복원 가능해 보이지 않았어요.
우리는 개발된 순간 존재 자체가 증명되었고, 오랜 세기를 거쳐 세상 구석구석 인생 속에 깊고 넓게 스며들었어요. 여자 당신이 헤덴(Heden) 동산 유일 존재라면, 이 세상에 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답니다. 나를 이용하지 않고는 일상의 편리함도 인간 생활의 윤택함도 누릴 수 없게 되었죠. 나는 다양한 모양으로, 용도로 여기저기 많은 인생 속에 있을 수 있었어요.
미나는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감아올린 머리 위에 흰 깃털 장식이 올려져 머리통 전체를 감쌌어요. 가늘고 야윈 몸에 수십 개의 깃털이 살포시 내려앉은 발레복을 입고, 발레 슈즈를 꺼내 바라보며 해맑은 미소를 짓던 미나 얼굴이 잊히지 않아요. 나는 발레 슈즈를 만들 때 이용되어 미나가 파괴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어요.
무대 조명이 켜지고 알 속에서 기지개를 켜며 하얀 새 한 마리가 올라왔어요. 새는 길고 가는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는 방법을 모르는 듯, 높은 곳을 날아오르기 위한 몸짓으로 사랑스러웠죠. 긴 팔을 하늘을 향해 뻗어 허공에 몸을 띄우고, 다리는 바닥에 내리기를 거부하며 올랐어요. 미나는 무대 위 작은 새가 되어 공기보다 가벼운 몸짓으로 관중을 압도했죠. 나는 슈즈에서 미나의 무게를 전혀 느낄 수 없었어요.
미나는 발레 콩쿠르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탁월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진학하는 특목고등학교에 입학했어요. 미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먹는 것도, 생활 습관도 철저하게 관리하고 지켰죠. 그때 미나 보다 두 살 많은 남자 선배 무용수가 다가왔고, 그는 미나의 파트너로 자청했어요. 또래들의 질투 어린 시선이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미나는 무척 기뻐했어요. 자기보다 경험이 많은 실력 있는 선배가 파트너가 되어 주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배울 것이 많다고 여겼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미나 몸에 예의를 갖추지 않는 것 같았어요. 자세를 교정해 준다며 미나 몸을 음흉하게 만지고, 의상을 갈아입는 곳에 불쑥 들어와 미나 허락 없이 의상 지퍼를 내리고 브래지어 끈을 푸는, 상식을 벗어난 행동도 서슴지 않았죠. 연습을 핑계 삼아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 불러내 이제는 반대로 자기 자세를 교정해 달라며 미나 손을 잡아끌어 자기 몸을 억지로 만지게 했어요. 거절과 불쾌감을 표현하면, 파트너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로, 선배 권위를 내세워 미나를 강압적으로 통제했죠. 미나는 가까운 이들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아무도 미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어요. 학교 선생은 몸으로 하는 예술 발레 특성상 파트너와의 밀착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로 미나 말을 불평으로 여겼고, 부모님은 미나의 예민성과 결벽증 때문이라 여기고, 미나 말을 깊이 들어주지 않았죠. 친구들은 오히려 실력 있는 선배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다고 미나를 따돌리기까지 했으니까요.
미나는 학교 발레 연습실에서의 연습을 포기했고, 그를 피해 다니며 맑은 미소를 담고 있던 얼굴은 어느새 그늘이 내려앉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선배는 그동안의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며 학교 밖에서 만나기를 청했고, 미나는 응했어요. 그는 미나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사과했고,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노래하고 잊어버리자고 했죠. 그날 미나는 시끄러운 음악이 울리는 폐쇄된 공간에 갇혀, 머리채를 잡히고 젖가슴을 유린당하며 가랑이에서 고통스러운 절규의 핏줄기가 만들어져 처참하게 뭉개지고 허물어져 부서지고 말았어요.
미나 부모님은 만신창이가 된 미나를 외부와 차단된 병실에서 훼손된 처녀막 성형을 먼저 하게 했어요. 그리고 미나에게 미래를 위해 그 일을 발설하지 말라는 함구령도 잊지 않았죠. 미나는 그날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안정을 찾지 못했지만, 부모님의 판단을 믿고 순응했어요.
하지만, 선배 남자 무용수는 자기가 괴물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운 듯, 미나 이야기를 왜곡해 퍼트리고 다녔어요. 미나는 그의 거짓말을 항변하고 설명할수록 악의적인 더러운 소문이 무성해지는 현실이 비참했어요. 사람들은 미나에게 노래방에 따라간 것도 평소에 선배가 자기 마음을 받아 주지 않자, 미나가 그의 미래를 망치려고 의도한 것이라 말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미나가 여자로서 남자에게 빈틈을 주어서 당한 일이라며, 왜 노래방에 따라갔냐며… 오히려 미나를 질타했죠. 미나는 학교에 자퇴서를 내야 했어요.
미나는 꿈꾸는 것을 멈춰버렸어요.
긴 머리카락도 짧게 잘랐고, 여성스러움이 녹아 있는 발레복과 나는 상자에 담겨 장롱 깊이 숨겨졌어요. 미나는 우리처럼 상자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한 채 집 안에만 있었어요. 그리고 잠만 잤어요. 자고 일어나면 먹고 다시 잠을 잤어요. 미나 가냘픈 몸은 어느새 체중이 늘어 형태가 변해버렸어요. 그렇게 오랜 시간 미나는 자신을 포기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미나가 장롱 속을 헤집고 내가 담겨 있는 상자를 꺼내 들고 외출했어요.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 상자 속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빛이 있는 밖으로 나올 수 있어 좋았어요. 하지만 미나 발걸음은 심상치 않았어요. 공용 화장실에서 상자를 열고 발레복을 꺼내 퉁퉁해진 몸에 억지로 끼워 넣고 양손에는 슈즈, 나를 하나씩 들고 숨을 헐떡이며 들어간 곳은 선배 남자 무용수가 세계 대회에서 입상한 소감을 발표하는 기자 회견장이었어요. 미나는 그 남자 무용수에게 돌진했고, 양손에 들고 있던 슈즈로 그의 얼굴을 세차게 여러 번 내려쳤어요.
보안 요원들에게 저지당하는 미나 모습은 취재 카메라 플래시를 마구 터지게 했고, 경찰에 연행되는 영상이 생중계되었어요. 오랜만에 미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를 볼 수 있었죠. 그제야 세상은 미나에게 관심을 가졌어요. 그런 미나의 돌발적 행동에 대한 원인을 각각의 시선으로 해석했고, 그 해석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 남자 무용수가 어딘가로 숨어 버린 것을 보면 그도 미나처럼 엄청난 타격을 경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깊숙한 장롱 속 상자로 다시 들어가지 않았고, 새로운 모습을 위해 재활용 상자에 담겨 어디론가 보내졌어요.
다가구 빌라가 다닥다닥 붙어 언덕이 오르락내리락, 얽히고설킨 전깃줄이 이 집 저 집 파도를 타고, 질서 없어 보이는 작고 큰 창문 속으로 사람들 말소리가 정겨운 동네, 소박하고 아담한 골목길을 비추는 가로등 속에 있을 때의 이야기예요.
내 불빛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 대부분은 고단하고 지쳐 보였어요. 온종일 붕어빵을 팔고 늦은 밤 손수레를 힘겹게 밀며 올라오는 박 씨 아저씨, 새벽같이 출근하는 옥탑방 영희는 늘 야근하나 봐요. 지방에서 온 공시생은 여러 번의 실패로 좌절의 한숨과 무거운 책가방에 어깨가 눌려 땅만 보고 다니는 것 같아요. 가끔은 오지 말았으면 하는 사람도 있어요. 매일 똑같은 노래를 부르며 도망가 버린 아내에게 욕설을 뱉는 주정뱅이,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주절대며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소변을 갈기는 오 씨 총각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찾아와요. 그런 오 씨 총각 소변 자국을 물청소하며 오만가지 거친 말을 쏟아내는 정 씨 할머니 고함치는 소리는 좁은 골목 곤궁함의 탄식으로 들려요. 가로등 기둥에 낙서하는 어린아이들과 음란물 스티커를 붙이는 아르바이트생들은 단속 요원 호루라기 소리를 들어야 흩어지고, 무리 지어 머무는 비행 청소년들의 담배 연기는 어린 그들의 불안한 미래의 한숨이 되어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요.
내 불빛이 드리워지는 지하 셋방 혜진은 근처 초등학교 기간제 교사였어요. 정교사의 꿈을 꾸며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하는 성실하고 근면한 선생님이었죠. 늘 혼자 다니던 혜진이 어느 날 한 남자와 내 불빛 아래에서 입맞춤을 시작했어요. 그는 같은 학교 정교사로 그들은 자주 내 불빛 아래에서 작은 애정 행위를 시작하더니 점점 그 행위가 좀 짙어진다 싶었어요.
남자의 입맞춤은 어느새 혜진의 얼굴을 거칠게 물고 빨아 댔고, 그의 손은 혜진의 가슴과 엉덩이를 거침없이 주물러 댔죠. 어느 날은 혜진의 팬티 속으로 그의 손이 들어가자, 혜진이 세차게 밀어내며 거절하고 가 버렸어요. 혜진은 남자 행위에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혜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위라며 억압적인 회유를 하고 있었어요. 남자는 징징거리는 표정으로 혜진에게 섹스를 부탁할 때도 있었고, 조급하게 화를 내며 혜진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날도 있었어요. 혜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어느 날 혜진은 온몸이 경직되어 있었고, 그는 무섭게 혜진에게 화를 내고 있었어요.
혜진은 그에게 연인이 아닌 동료로 지내길 바란다며 헤어짐을 요구했어요. 그는 혜진에게 협박에 가까운 괴물의 언어로 설득했지만, 혜진이 더는 응하지 않으려 하자, 그는 사람 얼굴 가면을 벗어던지고 괴물로 돌변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어요. 그는 정신을 잃은 혜진을 어두운 골목으로 끌고 가, 허기진 괴물의 습성을 자제하지 못하고 혜진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렸어요. 그날 이후 그는 오랜 기간 수시로 찾아와 혜진을 참혹하게 짓뭉개고 있었죠. 혜진은 그에게서 벗어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피폐해진 모습으로 공포에 휩싸여 흥분해 날뛰는 괴물 앞에서 떨고만 있었어요. 반복된 그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성적 학대로 혜진은 자기다움을 잃어, 모든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어요.
그날도 혜진은 그에게 자신을 포기하고 내어준 듯했어요. 그가 잠든 사이 튀어나올 듯 부어오른 멍든 눈두덩이와 찢어진 옷을 걸친 혜진은 맨발로 나와 내 불빛 아래에서 넋을 놓고 한 참 생각에 잠겨 서 있었어요.
혜진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초등학교 교사였어요. 학생들을 인솔해 현장학습을 다녀오는 길에 큰 교통사고가 났고, 어린 학생들을 구하다 참변을 당하고 말았죠. 혜진은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할머니는 혜진이 부모님처럼 좋은 교사가 되길 바랐어요. 그녀는 내 불빛 속으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교사의 꿈을 태워 날려 보내고 있었어요. 상처투성이 몸과 영혼 없는 얼굴로 다시 들어갔다 나온 그녀 손에는 핏방울이 떨어지는 칼이 들려 있었어요. 그녀가 나온 지하 셋방에서는 거친 괴물의 신음이 그녀의 그림자 끝자락을 놓치고 있었죠. 혜진은 손에 들린 피 묻은 칼을 내 불빛 아래에 떨어트렸고, 맨발 발자국은 핏자국을 남기며 멀어졌어요.
얼마 뒤 구급차와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좁은 동네 골목이 소란스러워졌어요. 다행히 그는 죽지 않았어요. 구급차에 실려 갈 때도 혜진을 향해 절대 자기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 댔죠. 멀찍한 길가에 세워진 순찰차 속에는 수갑을 찬 혜진이 고개를 떨구고 분노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어요.
오랜 기간 혜진의 이야기는 복닥복닥 다닥다닥 붙은 집과 담장 사이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었어요.
“여자가 얼마나 독하면 칼로 남자를 찔러?”
“남자가 오죽 못살게 굴었으면 그랬겠어.”
“그래도 그렇지. 학교 선생이라는 여자가 행실이 어땠으면 남자가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들락거렸겠어?”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 나지. 찾아온 남자가 힘으로 하면 어쩌겠어. ”
“그러니, 부모가 딸자식을 저렇게 바깥에서 따로 살게 해. 여자애들은 밖으로 돌리면 안 돼, 시집갈 때까지 집에서 붙잡고 있어야지.”
“요즘 애들이 집에 붙잡혀나 있냐고?”
“남자는 정교사라던데, 기간제 여교사 잘못 만나 신세 망쳤지.”
“남자가 막무가내이면 약한 여자가 별수 있어?”
“힘센 괴물을 못 이기면 약자가 피해 다니는 영리함도 있어야지.”
“혜진 씨 얼굴은 곱게 생겼는데, 팔자가 사납네. 저런 일을 다 겪고….”
“평생 얼굴 들고 다니겠어? 쯧쯧쯧….”
나는 그들의 말소리가 참 불편하게 들렸어요. 혜진은 뭉개지고 허물어져 복구가능해 보이지 않았건만, 어째서 사람들은 그런 혜진을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나는 혜진이 궁금했지만, 혜진이 살던 집에는 다른 세입자가 들어왔어요.
어느 날 붕어빵 장수 박 씨 아저씨와 옥탑방 영희가 늦은 귀가를 하며 나누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혜진은 여성 인권 단체 도움을 받아 정당방위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해요. 많은 시간 데이트 폭력의 트라우마로 치료받아야 했고, 그녀는 힘으로 대응할 수 없는 약한 여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 제도와 법을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성능이 좋은 CCTV가 장착된 가로등 공사가 시작되었고, 내가 철거될 때까지 혜진의 모습은 볼 수 없었어요.
내게는 고통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저 분열되고 분회 되어 흩어져서 모이기를 반복하면, 다른 개발품이 되어 다른 세상에 와 있거든요. 전에 내가 어디서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죠. 그래서 언제나 나는 재활용이 되는 순간이 기대돼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사용될까 하고요.
어느 날은 눈을 떴는데, 도무지 내가 무엇으로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내 모습이 그리 싫지 않았어요. 몽글봉글 말랑몰랑 투명했고, 무엇보다 여자에게 자신감 같은 감정을 줄 수 있는 도구였으니까요. 가슴 수술용 실리콘이 되어 있었어요. 연주는 나를 가슴에 담은 것뿐 아니라, 몸 구석구석에 내 친구들이 들어와 있더라고요. 우리는 틈날 때마다 수다를 떨었죠.
“이 여자는 뭐 하는 인간이기에 몸에 이렇게 많은 우리가 들어와 있는 거야?”
“연예인이래.”
“이 여자는 성형중독인 것 같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사는 연예인이라는 직업 때문일 거야.”
“모든 여자 연예인이 이 여자 같지는 않아”
“변화를 시도하는 인간의 욕구에 우리가 동참했을 뿐이야.”
“어찌 되었든 우리가 이 여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니 괜찮아.”
“이 여자는 우리에 대해 알게 되면 무척 부러워할 거야, 무궁무진한 성형과 변화로 재탄생하니까.”
연주는 여섯 살 때 아동복 모델로 뽑혀,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 보탬이 되기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어린 나이에 시작한 사회 활동이었지만 좋은 연기자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죠. 학업을 위해 청소년 시기에 잠시 활동을 접었지만, 가는 곳마다 길거리 캐스팅될 만큼 개성 있고 돋보이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어요. 성형 중독자도, 사치스러운 겉모습으로 대중의 시선을 끌고 싶어 하는 연예인도 아니었어요. 다만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제대로 된 연기자가 되고 싶은 재능 많은 사람이었죠.
대학 입시가 끝날 무렵 드라마 출연 요청이 있었어요. 중년 부인 역할이지만 성인 연기자로 데뷔할 좋은 기회라 여기고 열심히 준비했어요 하지만, 그녀의 순수한 열정은 괴물들의 신선한 먹잇감에 불과했어요.
그녀를 도와주겠다던 매니저는 아역 배우 출신 연주에게 몸을 드러내는 야한 옷을 입혀, 육감적인 몸짓을 가르치고, 요구하며 섹시미를 지닌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했어요. 성적 경험이 많을수록 폭넓은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감언(甘言)으로 연기 지도라는 명분을 내세워 연주에게 성관계 체위를 가르쳤죠. 그는 작품 오디션을 볼 때마다 연주에게 외모에 대한 성형을 강요하고, 그런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괴물들과의 술자리 접대에 데리고 다니며 시달리게 했어요.
어떤 영화감독은 그녀에게 자기가 연출하는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시켜 주겠다는 거짓말로 성추행을 일삼았고, 어떤 기업인은 그녀에게 스폰을 서 주겠다며 변태 성행위로 학대했어요. 그녀는 그런 모든 상황이 연기자로 커 가는 잠시의 고통이라 여겼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 가장(家長) 노릇을 해야 하는 현실 때문에 참고 견뎌 보려 했어요. 하지만, 연주는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혐오증으로 슬픔에 젖어 눈물로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아졌어요. 급기야 술과 수면제 없이는 잠을 청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으로 쇠약해지고 있었죠. 그런 그녀의 고통을 알고 있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괴물의 막강한 힘과 권력 앞에 자신들에게 미칠 불이익을 우려해 그녀의 처참한 현실에 무심했어요.
어느 날은 언론사 관계자에게 술 접대를 하면서 술에 취해 더러운 괴물 때문에 자기 몸과 영혼이 섞어 죽어가고 있다고, 그에게 분노를 쏟아냈어요. 그녀의 고통 어린 울부짖음에 그는 연주가 하룻밤 재활용품에 불과 한 존재라고 했어요. 그리고, 연예인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같은 것은 버리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힘 있는 괴물들에게 몸이나 팔아 돈이나 챙기라는 모멸감을 안겼죠. 연주는 그날 호텔 객실로 끌려가 그의 성 노리개가 되고 말았어요.
연주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잠이든 그를 바라보며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자신을 마주했어요. 그리고 잠시 자신이 꿈꾸었던 연기자의 모습을 상상했죠. 시장통 억척스러운 아주머니가 되어 보고, 재벌가 철없는 막내딸도 되어 보고, 거친 여자 형사가 되어 몸을 날려 사건을 해결하고, 정신병원에 갇힌 사연 많은 할머니도 되어 보고… 다양한 역할을 통해 여러 삶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폭넓은 시각을 가진 연기력을 인정받는 여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또 연주는 생각했어요. 꿈을 꾸는 것조차 짓밟혀야 하는 여배우의 마지막 모습을 연기해 볼 생각을 못 했구나! 하고요… 그날 연주는 곱게 화장하고 멋스러운 드레스를 차려입고 마지막 연기를 하는 심정으로 호텔 널찍한 창, 어두운 밤하늘 속에 뿌려진 수십 개의 별 속으로 몸을 던져 영원히 잠들어 하늘에 별이 되고 말았어요.
연주의 죽음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어요. 그녀의 죽음으로 흉측하고 징그러운 괴물들의 정체가 드러났고, 그녀를 짓밟고 돌려 사용하는 재활용품으로 취급했던 괴물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죠. 연주는 비록 세상에 없지만, 그녀는 진정 아름다운 여자였어요. 그녀의 육신은 불 속으로 들어가 한 줌 가루가 되었지만, 우리는 남아 다른 곳으로 보내졌어요.
‘여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내 눈에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여자’라는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무력한 존재가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