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

by 조은이

여자의 변화는 세상을 재구성시킨다고요? 여자의 변화 때문에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해 가는 세상에 여자의 변신이 필요한 게 아닌가요? 내게도 시작이 있었고, 이미 내 역할을 시작했을까요? 그래요, 누군가로 인해 내 존재가 잉태된 순간부터 나의 역할은 시작되었는지 모르죠? 하지만, 당신처럼 선택받은 여자도, 어디든 쓰임 받는 플라스틱 같은 존재도 아닌 것은 분명했어요.


플라스틱이 본 엄마 아빠들은 닥친 위기 앞에서 안타깝게도,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떠 올리지 못했어요. 어린 자식에게 자기 존재가 어떤 가치인지 생각할 틈조차 없을 만큼, 자신 속에 자리하고 있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와 고통이 불쑥 튀어나와, 그 상처와 고통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이성을 눌러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요? 마음에 흉 저버린 상처는 내성이 없는 법이거든요. 자기 인생을, 자기 몸에서 나온 생명의 불행을 선택하는 여자, 엄마가 있을까요?




결혼하고 출산할 때까지 한동안 남편은 내가 만들었던 가상의 친정 부모와 과거 환경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나는 그를 닮은 예쁜 딸을 출산했고, 힘들게 꾸린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남편은 내게 먹고사는 문제로 결핍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일상적 대화가 어려울 만큼, 모든 면에서 서툰 남자였어요. 아기가 그런 아빠와 눈을 마주하면 울어대는 바람에 딸아이를 제대로 품에 안아 보지도 못했죠. 그와의 결혼 생활은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여자 스타킹에 집착하는 그의 병적 취향은 남편이 섬뜩하기까지 했어요.


침실에서 남편에게 시달리고도 밤낮이 바뀌어 우는 딸 울음소리조차 남편 예민성을 자극하지 않을까! 조심했어요. 딸아이를 업고 집 밖에서 밤하늘을 거닐었던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집안이 어질러져 있거나 딸아이 칭얼거림조차 거슬릴 때면 밥을 먹다가도 말없이 나가버리는 남편 어려운 성격을 맞추느라 참 고단하고 버거운 일상을 견뎌야 했어요. 그러함에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직을 가진 그의 아내라는 자리는 세상으로부터 세상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살아온 제게, 세상과 사람들 속에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공간 같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 퇴근 시간이 가까웠지만 남편은 들어오지 않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어요. 남편이 퇴근길에 여성들 스타킹을 훼손시키는 장면이 CCTV 여러 곳에 찍혔고, 출동한 경찰에게 현행범으로 잡혔다고 했어요. 전문직 직업을 가진 초범이라 벌금과 경고 정도로 훈방 조치 되어 집에 왔지만, 남편은 내게 어떤 변명도 설명도 하지 않았어요. 그 날밤은 그동안 모아 두었던 훼손된 스타킹을 꺼내 잔인하게 찢고 갈기며 내 벌거벗은 몸을 미친 사람처럼 험하고 무섭게 다루고 취했어요. 나는 남편에게 병원 가서 치료받아 보자고 간청했고, 남편은 그런 제게 지금까지 남편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비열하고 나쁜 표정으로 말했어요.


“왜? 당신은 나보다 낫다 여기는 거야? 설마 내가 당신에 대해 몰랐다고 생각했던 거야? 순진한 척 그만하지. 당신은 호화스러운 호텔 방에 순순히 따라 들어왔고, 내 가방에서 나온 스타킹을 당신 다리에 넣어 줄 때 흥분된다고 했잖아. 내가 미친 광기를 가진 괴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잖아. 내게 당신 과거와 환경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어, 내가 스타킹에 하는 학대를 받아주는 여자면 어떤 여자라도 상관없었거든…”

남편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스타킹에 대한 집착을 받아 줄 수 있는 아무 여자가 필요했던 거예요. 나 역시 그에게 나를 진실하게 보여 주지 않고 아내와 엄마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에… 남편의 말에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어요. 내가 쓴 가면은 내게 치명적 약점이 되어 괴물로 변한 그에게 어떤 반박도 할 용기를 내지 못하게 했어요.


그날 이후 남편은 나를 대놓고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어요. 스트레스를 받거나 갑작스레 예민해질 때는 어김없이 내 몸에 스타킹을 신겨 내 고통을 즐기고 조롱하며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참지 못했어요. 그의 병적 행위를 지켜보면서 괴물의 성장통을 보는 것 같은 몸서리가 쳐졌어요.
나는 많은 시간 인내하고 참아 내며 둘째 아들을 낳았어요. 두 아이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았지만, 보육원에서 자란 나는 엄마가 없었기에 엄마라는 이름으로 적당한 엄마 역할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어요. 남편에 대한 혐오감으로 아내의 이름을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때마다, 두 아이 엄마라는 이름표가 커다랗고 선명하게 내 영혼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어요. 두 아이 옆에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어 주는 것이 최소한의 엄마 역할인 것 같아 아내라는 이름을 버리지 못했어요.

남편은 이후에도 몇 차례 경찰서를 들락거렸고, 다니던 직장에서도 알게 되어 더는 나갈 수 없게 되었어요. 그날도 남편은 온종일 거리를 헤매고 다녔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어떤 여자 스타킹을 훼손시켰고, 그 여자가 새 스타킹을 구매해 가까운 화장실로 들어갔을 때, 그날은 웬일인지 CCTV속 남편이 여자 뒤를 따라 들어갔어요. 한참 뒤 출동한 경찰에 의해 온몸에 붉은 피를 덮어쓴 모습으로 남편은 손목에 수갑을 차고 나왔어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피투성이가 된 여자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얼마 뒤 사망하고 말았어요. 남편은 여자에게 성폭행을 시도하였으나, 강한 저항으로 여의치 않자, 잔인한 폭행으로 여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죄목으로 감옥에 수감되어 재판에 넘겨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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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유족과의 합의와 남편 재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팔고, 돈 될 만한 것을 처분해 작고 초라한 월세방으로 이사했어요. 그리고, 네 살 딸아이 미나 손을 잡고, 백일이 좀 넘은 아들 동건이를 품에 안고 그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에 면회 갔지만, 그는 우리를 만나러 나오지 않았어요. 재판장에서 대면한 그의 모습은 완전한 괴물이 되어 있었죠. 그는 떳떳하고 당당한 어조로 자신을 변론했어요.


“여자는 스타킹을 신고 집을 나오며 나가지 말라 매달리는 어린 아들을 내버려 두었어요. 남자를 만나기 위해 어린 아들을 버렸어요. 남자와 관계가 좋을 때는 아들에게 친절했고, 남자와 어떤 문제가 생기면 아들에게 차가웠어요. 아이는 멀어지는 여자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소리 질렀어요. 엄마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런 여자는 없어져야 합니다. 그 아이에게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아이는 나 같은 괴물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여자는 괴물을 키우는 끔찍한 바이러스죠. 판사님,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자의 어린아이를 대신해 여자를 처단했을 뿐입니다.”

남편 변호사는 남편을 정신과 진단을 받게 해 달라며 심신 미약을 주장했지만, 판사는 반성도 죄책감도 없는 남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어요.
얼마 뒤 남편으로부터 온 이혼 서류가 동봉된 편지에는 자기 인생에서 나와 아이들은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들이라며, 없어져 달라고 했어요.


미나는 아빠를 닮아 식성도 까다롭고, 예민한 편이라 체중이 평균에 미치지 못해요. 둘째 동건이는 누나의 예민성 때문에 엄마가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잘 울지도 않고, 뭐든 주는 대로 잘 먹어서 살이 올라 토실토실해요. 나는 동건이를 둘러업고 미나 손을 꼭 잡고 일자리를 찾아 나섰어요. 온종일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 일을 달라는 말을 참아 꺼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어요.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집 근처 인력사무실에 들러 어디 파출부라도 나갈 자리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어요. 사무실에서 이웃집 아주머니를 마주쳤고, 아주머니는 내게 동네 아줌마들이 하는 부업이라도 해 보겠냐 했어요.


“윗집 옥탑방에 이사 온 새댁이구나.”

“예”

“아이고, 딸내미는 인형같이 예쁘고, 아들 인물은 범상치 않네, 장군감이네.”

“고맙습니다.”

“일자리 알아보려고?”

“예, 애들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애들 데리고 어디 다니면서 무슨 일을 하겠어, 동네 아줌마들 모여서 하는 부업이라도 같이해 볼래?”
“예,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좀 끼워주세요.”

“아이고,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다칠 것 같아서 안 되겠네.”

“무슨 일인데요?”

“쇠로 된 우산대에 철심 끼우는 일이라, 기름 냄새도 나고 아이들 잘못 만져서 어디 찌르기로도 하면 어째?”

“예, 좀 위험하긴 하겠어요. 그래도 한번 해 볼게요.”


기름이 흠뻑 묻은 쇠 우산대에 철심 하나를 끼워 넣으면 개당 2원을 쳐주는 일을 같이했지만, 동네 아낙들의 소일거리에 불과했고, 종일 끼워도 몇천 원 벌기가 쉽지 않았어요. 생활고에 시달리며 내가 미나와 동건이, 두 생명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뼈저리게 와닿았어요. 내가 변형을 꾀하지 않았다면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고, 결혼하지 않았다면 두 생명에게 이런 현실을 겪게 하지 않았을 텐데요. 두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나로 인해 세상에 나와 버렸는데, 두 아이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워 어찌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부자 동네 파출 일을 하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찾아와서 제게 두 아이를 좋은 집으로 보내 크게 하면 어떻겠냐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어요.


“새댁, 형편을 보니 애들 키울 상황이 안 되겠더구먼, 집 월세도 몇 달째 밀렸다며? 집주인 형님이 새댁 보면 안쓰러워 방값 달라는 말도 못 꺼내겠다고 걱정하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아이들 부잣집으로 보내 크게 하면 어때? 내가 좋은 집 알아봐 줄 수 있는데, 애들 크면 생모 모른척하겠어? 일단 애들 굶기지는 말아야지. 애들 생각해서 좋은 집에서 크게 하는 게 더 좋잖아.”

“아주머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주머니도 자식 키우고 살잖아요.”

“내가 자식 키워봐서 하는 말이야. 내가 부잣집 파출부 나가면서 우리 애들 키웠어. 그 집 애들 먹고 남는 음식 얻어 와서 우리 애들 먹이면서, 이놈에 세상 태어나는 건 똑같이 태어나는데, 먹고사는 건 어찌 이리 불공평한가 싶어 얼마나 눈물을 쏟으며 애들 키웠는지 몰라. 새댁, 지금이야 애들 건사하겠다 싶지만, 애들 크는 거 보면 돈 없이 못 키워. 차라리 어릴 때 모를 때 부잣집에서 잘 먹고 잘살게 하는 게 현명한 거야.”


두 아이만큼은 세상 속 평범한 이웃들과 어우러져 살아가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아주머니 소개로 미나는 아들만 둘인 댁으로, 동건이는 자식을 얻지 못한 댁으로,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으로 입양 보내고 말았어요. 아이들 양부모에게 입양 사실을 숨겨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죠. 나는 나 자신과 도모(圖謀)해 얻은 아내와 엄마의 이름을 나 스스로 내려놓아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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