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상실의 숲 02화

2. 테미타세(demitasse)

by 조은이

어느 해 11월 대학입시 수능시험이 끝나고 미술 대학 지원생들의 실기 시험 준비로 한창 바쁠 때, 병원에 입원 중이던 엄마에게 전화가 왔었다.

“숙아, 엄마가 와이래 아픈지 모르겠다.”

“엄마, 내 바쁘다, 나중에 전화할게.”

엄마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3일 뒤 새벽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숙아, 놀라지 말고 들어라. 엄마 돌아가셨단다.”

“......”

“우리는 지금 애들 챙겨서 대구 내려간다. 니도 대구 **병원 영안실로 찾아온 나.”

책상 위 시계는 새벽 세 시 삼십칠 분을 지나고 있었다.


인숙의 엄마는 3년 전 시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알 수 없는 고통으로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었다. 전체적으로 몸이 매우 쇠약하다는 진단 말고는 또렷한 병명을 찾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고만 있었다. 시골 동네 무당에게 굿을 받아 보기도 하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기도 했지만, 결국 끼니를 끊고 자리보전하고 누워 버렸었다. 의사는 심신 쇠약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생긴 거식증으로 의심이 된다고 했고,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영향공급 이상의 치료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었다.

인숙과 마지막 통화를 끝으로 인숙 엄마는 32킬로그램의 몸무게로 수면 상태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염(殮)을 하는 엄마 육신은 인숙이 본 엄마 얼굴 중 가장 편안하고 평온해 보였었다.


사람들은 인숙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고 하면, 중상층 가정에서 적당한 교육을 받은 부모에게 상식적인 돌봄을 받고 자랐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숙은 평탄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었다.

7살 때 아버지로부터 보육원에 보내지게 되었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인숙을 집으로 데리고 왔지만, 공장에서 일하며 학업을 병행하는 산업체 학교에 보내버렸었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이런저런 실패로 다 날리고, 술에 빠져 폭력을 행사했던 인숙 아버지는 당신 실패의 초라함과 가난의 책임이 자식, 아내, 환경 때문이라 억지 부리며 가족을 학대했었다. 인숙 엄마는 남편의 폭력으로 무력감에 눌려 남편이 딸들에게 하는 횡포를 묵인했었고, 인숙은 그런 엄마의 무능함에 표출하지 못한 분노가 쌓여 엄마와의 관계도 그리 좋지 않았었다.
인숙은 고등학교 2학년 학기 끝자락 공장이 부도나면서 다니던 학교도 더는 다닐 수 없게 되었고, 아버지 몰래 퇴직금을 찾아 독립하게 된다. 독서실을 전전하며 대입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하고, 일자리를 찾던 중 입시 미술학원 청소부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가게 되었다. 미술학원에서 청소와 정리하는 일을 하면서 학생들이 버린 재료들로 틈틈이 그림 연습을 하게 되고, 인숙을 눈여겨본 미술학원 원장은 인숙의 재능을 발견하고 미대 입시 준비를 권하게 된다. 인숙은 대학 진학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해 가며 미친 듯이 살아냈고, 수능 시험 점수는 그리 잘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실기 비중이 높은 대학에 실기 시험을 치르고 입학하게 되었다. 지방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 미술학과에 합격했을 때, 인숙은 미술학원에 다니고 있는 평범한 또래 친구들이 그리 부럽지 않을 만큼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었다.


“없던 정이 생긴 건가...”

인숙은 꿈속에 찾아온 엄마 눈물 어린 얼굴을 떠올리며 혼잔말을 해 본다.

식탁 위에 있는 빈 접시들을 싱크대로 가져가서 설거지하고, 마른행주로 닦아 물기를 제거한 그릇들을 들고 본채 집으로 건너갔을 때, 콘과 로라는 오후 티타임 중이었다.

“안녕 인숙, 음식은 어땠어?”

“로라 정말 맛있었어요.”

“다행이야 내 음식이 네 입에 맞아서”

“인숙, 로라 음식 솜씨는 최고라오, 내 아내라서가 아니라 누구나 로라 음식을 좋아한다오.”

“네, 그럴 것 같아요. 그런데 두 분이 드시는 커피 향이 참 좋아요. 저도 한 잔 줄 수 있나요?”

“물론이지, 이쪽으로 앉으렴.” 콘이 일어나며 인숙에게 앉기를 권했다.


테미타세(demitasse)의 조그만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의 기분 좋은 쓴맛과 고소함의 향에 빠져들고 있을 때 콘이 물었다.

“인숙, 잠시 후에 여기서 가까운 한국 마트에 가지 않겠어?”

”근처에 한국 마트가 있어요?”

“차로 7분 정도 거리에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큰 쇼핑센터가 있어. 그곳에 한국 마트도 있고. 가서 필요한 거 쇼핑해 오면서 내일 시내 나갈 때 이용할 수 있는 트램 스탑과 버스 정류장도 알려 줄게, 어때?”

“콘, 그렇게 해 주면 저야 감사하죠. 고마워요.”

“별말을, 무엇이든 우리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줘, 우리 집에 사는 이상 너는 우리 가족이야.”

“인숙, 우리를 엄마, 아빠로 편히 부르렴, 우리 집을 거쳐간 모든 친구들이 그렇게 불렀거든. 엄마에게 떼쓰듯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내가 만들어 줄 수 있는 음식은 언제든 만들어 줄게.”

인숙은 조금 서먹하고 어색한 콘과 로라의 따뜻한 말에 스스로 치료하지 못하고 때로는 쓰라리게, 가끔은 작은 거슬림의 고통으로 낫지 않고 있는 상처 자국 위에, 치유 연고가 발라질 때의 보호막 같은 것이 처지고 있는 것 같아 코끝이 찡했다.

“네 그럴게요.”

테미타세(demitasse) 작은 잔 안 향이 온몸에 스며들었고, 인숙의 초침 소리는 향에 취해 멈춰버린 듯 조용했다.


“인숙, 지금 갔다 오겠어?” 콘이 점퍼를 걸치며 물었다.

“넵, 방에 가서 겉옷 걸치고 금방 나올게요.”


아침부터 내린 늦가을 비에 젖은 나뭇잎은, 찬 공기를 담은 잦은 바람에 이별을 준비하는 슬픔의 조아림을 멈췄고, 젖은 몸은 서로를 깊게 포옹하듯 엉겨 붙어 눈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별의 아쉬움이 담긴 이슬을 받아 삼키는 땅은, 깊은 곳에 남아 있던 가을 향을 슬금슬금 가을 촉촉함 속으로 올려 보내고, 땅속 가을 내음은 찬 공기와 함께 세상 구석구석을 물들이고 있었다.

인숙은 콘의 낡은 자동차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아침에 느끼지 못했던 멜버른의 늦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잠시 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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