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림의 시점

by 은하수

얼마 전 읽은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서
주인공 나티코는 어느 날
‘이제 앞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어’라는 감각을 느낀다.


그리고 곧바로 행동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깊은 명상을 배우기 위해 출가한다.


출세한 청년의 선택 치고는 극단적이다.
그래서인지 주인공보다 그의 부모 마음이 더 궁금해졌다.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스웨덴이라고 해서 다를까?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하나다.
지켜보고, 기다리고, 자녀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나티코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답 코스’를 밟아왔다.
공부를 잘했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좋은 회사에 취업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말해온
“공부를 왜 해야 하느냐”의 종착지다.


하지만 ‘일’을 만나는 순간부터는
다음 목표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부모는 회사에서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하는지까지
끝까지 정해 줄 수는 없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가치와
내가 살아가고 싶은 목적이 어긋날 때,
사람은 처음으로 ‘왜?’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존재가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사람은 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그 지점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순간인 것 같다.


나티코는 그 질문 앞에서 숲으로 들어가
명상을 하며 자신을 오롯이 체험하는
‘알아차림’의 시간을 선택했다.


인생에서 이런 시기가 올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불안에 끌려 익숙한 일터로 돌아간다.


그 선택과
나티코의 선택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누군가는 젊을 때 열심히 일해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나티코처럼 인생에 한 번,
세상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살아보는 선택도
의미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삶은
대부분 사람들이 말하는 흐름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티코의 삶이나
28세에 무기수가 되어 20년의 감옥 생활을 거친 뒤
세상으로 나와 삶을 다시 세운 신영복 교수님의 인생을 떠올리면, 방식은 달라도 모두 고귀한 삶처럼 느껴진다.


나티코의 17년, 신영복 교수님의 20년.

그 시간을 사회 안에서 살았다면
과연 큰 차이가 있었을까?


두 사람 모두 50이 다 되어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그제야 세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게 되었고, 그 시기에 결혼을 하고
남은 시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며 살다
조금 일찍 생을 마무리한다.


17년, 20년의 공백이 있어도
이들이 먹고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정말 정년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야 할까?
재테크에 인생의 대부분을 매달려야만 할까?


자의로든 타의로든 자기 돌봄의 시간,
나를 알아가는 시간은
사실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시간인데
우리는 그 시간을 놓친 채 살아가는 건 아닐까?


나는 지금
어떤 시간 위에 서 있는 걸까?

내 삶이 또 다른 지점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아차리는 시점에 와 있다.


왜냐하면 이런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알아차림’이기 때문이다.


일에 대한 집착의 시간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것을 나누는 시기로
넘어가고 있는 나를
나는 지금 알아차리고 있다.




이전 14화나를 존중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