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일까?

by 은하수

올해도 설 명절 연휴가 조용히 지나가겠지 싶어 마음을 내려놓고 있던 연휴의 끝자락,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명절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는 걸 느낀다. 함께 모이면 좋다고 말하지만, 각자의 삶에서 겪고 있는 아픔을 잠시 감춘 채 웃고 헤어지는 시간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게 된다.


이번 명절은 주말에 친정을 먼저 다녀오는 바람에 형제들을 만나지 못했다. 분위기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엄마에게서 전해 들은 소식 하나가 연휴의 평온을 깨뜨렸다.


막내 동생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였다.

설마설마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지난달 아버지 제사 때, 동생의 말투와 표정에서 스쳤던 묘한 느낌이 있었다. 혹시 회사에서 힘든가 싶었던 그 직감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쉰을 넘기고부터 나의 예감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해졌다. 『논어』에서 말한 것처럼 오십이면 천명을 안다고 했던가? 이 나이는 세상의 기류가 읽히는 나이인지도 모른다.

가을에 만났을 때 스쳐 지나갔던 불안,

몇 년 전 시동생 가게에 들어섰을 때 느껴졌던 서늘함,
얼마 전 찾았던 공공기관 입구에서 감지했던 묘한 어둠까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기운들까지 읽히는 나이가 되었다. 눈치와 감이 살아 있다는 건 어쩌면 축복이 아니라 또 다른 번민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쉰을 넘겨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 “천명을 안다”라고 했을까? 하지만 요즘은 여든을 훌쩍 넘겨 사는 세상이다.

여든이 넘은 엄마를 보며 생각한다. 오래 산다는 것이 꼭 축복만은 아니구나 하고.

중년이 되어 회사에서 밀려나는 막내아들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고,
청년이 된 손주들의 고군분투를 바라봐야 하고,
갱년기를 지나 노년으로 접어드는 딸들의 건강을 걱정해야 한다.


장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오래 볼 수 있는 선물이지만, 그들의 고단한 시간을 함께 지켜봐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자식이 먼저 떠나는 모습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는 시간.


막내 동생은 아직 초등학생 딸을 두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를 떠나는 결정을 했을 동생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 생각에 밤이 쉽게 오지 않는다.


물론 이 시간이 동생을 더 단단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동생의 마음과 몸에 닿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나도 아프다.


그렇다면 여든을 넘긴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갈까?

나 역시 앞으로 아이들의 수많은 굴곡을 지켜보며 살아가야 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많은 장면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오래 사는 삶이란 많은 숙제를 안고 가는 삶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쁨을 오래 지켜보는 축복과 그들의 고단한 시간을 함께 바라봐야 하는 책임까지.


나는 이제 50대가 되었다. 세상의 기류를 읽는 나이가 아니라, 더 많은 장면을 감당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쉰의 촉이 조용히 말해준다.

나도 그랬듯,
막내도 이 시간을 지나 더 단단해질 거라고.
가족은 이런 시간을 통과하며 더 깊어질 거라고.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일까?

오늘은 그 질문을 가만히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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