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은 그렇게,
새삼 하찮은 일에 몰두한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일인데도
몸이 먼저 움직이고 손끝이 움직인다.
오랜만에 꺼낸 스케치북 위에
겨울 벌판의 나무와 집을 그려본다.
두텁고 진한 밑둥은 새로 구입한 8B 연필로,
하늘 가까운 잔가지는 2B나 B로
가느다랗고 조심스레 쌓아올린다.
아침부터 연필을 깎고
지우개 가루를 털어내고
그림에 머리를 박는다.
오늘의 하늘은 회색빛이다.
한낮인데도 늦은 오후처럼 어둡고 조용하다.
배경으로 깔린 어쿠스틱 팝송은
바닥을 기듯 낮게 흐르고,
중고서가 한쪽에서는 젊은 손님이
책을 읽으며 무언가를 끄적인다.
각자의 고요 속에서,
실처럼 가느다란 가지들을 이어간다.
봄이나 여름의 나무는
적당히 윤곽만 잡아도 되지만,
겨울의 나무는 손이 많이 간다.
가느다란 가지 하나하나가 모두 제 소리를 낸다.
거미줄처럼 촘촘한 선들은
무심한듯 그어나간다.
문득 머리를 들고 빠져나오니
연필과 그림, 흩어진 지우개 가루,
스케치북 위의 세상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풍경처럼 보인다.
의미가 있건, 없건
오늘도 무언가를 한다.
마치 거미가 줄을 치듯,
보이지 않는 면을 서서히 채워간다.
어제. 책방에 들른 북모임 회원이
“60부터의 인생은 어때요?”라고 물었다.
그 말에 걸려 어제 오늘 생각했다.
퇴직 후 방향을 잃고 헤매던 그 시간,
그 시절을 통과한 내게
정확한 대답은 없었다.
나의 인생은 50대를 끝으로 한 번 끊겼다.
60을 기점으로
새로운 출발선에 다시 선 기분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무엇이 옳은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유튜브에 떠도는 이야기들은
그저 쓰잘데기 없는 잡담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제는 아무도 평가하지 않는 시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나만의 하루.
멈추면 사라질 것 같은
비현실적인 감각 속에서
연필을 든다.
오늘은 천천히, 글씨를 쓴다.
급하게 흘려 쓰던 손길을 멈추고
종이에, 시간에, 나에게
조금 더 길게 머물러본다.
글자에 큰 의미가 없더라도
오늘은 써내려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