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와 낡은 원피스

by 기빙트리

오래된 낙엽색깔 책을 꺼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양장본의 담백한 표지가 여전히 마음을 끈다.

기억을 더듬어 책장을 펼친 순간,
문장은 그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한다.
어떤 날엔 힘이 되고, 또 어떤 날엔 흐린 하늘처럼 가슴을 짓누른다.


“아버지는 축복을 빌어주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세상을 떠돌고 싶어한다는 걸.
물과 음식, 그리고 밤마다 몸을 누일 수 있는 안락한 공간 때문에 가슴속에 묻어버려야 했던,
그러나 수십 년 세월에도 한결같이 남아 있는 그 마음을.”


그 소년의 아버지는
나와 닮아 있었다.

세상을 여행하며,
낯선 것들에 가슴 벅차게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벽은
생각보다 높고 두꺼웠고,
그 꿈은 어느새
‘말하지 않는 꿈’이 되었다.


“그에겐 겉옷이 한 벌 있었고, 다른 것과 바꿀 수도 있는 책 한 권, 그리고 양떼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가슴에 품어온 큰 꿈을 매일 실현하는 것,
바로 세상을 여행하는 일이 있었다.”


삶에 발목을 잡히기 전의 소년은 단순하고 자유로웠다.

인간의 본질은 어쩌면 그토록 가볍고 명료한 것일텐데.

자꾸만 늘어나 버린 일과 관계와 안주할 테두리가

나를 오히려 무겁게 만들고

그것들은 결국 부요하게 만들기보다는

내 머리와 꿈과 가슴을 갑갑하게 누르는 것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양들이 새로운 길에 관심이 없다는 거야.
양들은 목초지가 바뀌는 것이나 계절이 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지.
저놈들은 그저 물과 먹이를 찾는 일밖에 몰라.”


소년의 양들은 단순하다.
물과 먹이 외엔 관심이 없다.
그 단순함이 종종 부러워진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날들이 떠오른다.
넓은 세상은 보지 못하고
눈앞의 일, 사람, 역할에 매달린 삶이 이어졌다.
'우선순위니까', '지금은 급하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라는 말들이
하루하루를 밀어붙였다.

삶이 이끌리는 무언가에 의해 움직여졌다.


“인생을 살맛나게 해주는 건, 꿈이 실현되리라고 믿는 것이지.”


소년다운 신념은
어른이 되어 버린 오늘 속에서
상투적인 계산과 자잘한 기교들만 남았다.

늘 스스로가 걸림돌이라 여겨졌다.
비관적인 성향, 비평하길 좋아하는 습관,
성선설보다 성악설이 더 익숙한 사고방식.

최근 일련의 사건들은 그 기질 위에 기름을 부었다.
마음은 더욱 척박해졌고,
입은 닫아지고,
눈물은 더 흔해졌다.
책방 창밖으로 들리는 웃음소리나
지나가는 차들의 낮은 소음마저
먼 세계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부정을 멈추려 한다.
평생 손잡고 걸어온 외로움을
억지로 덮거나 지우려 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들여다보고, 돌보고, 다듬는 과정을 이어가려 한다.

때론 사람들과의 착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들은 좋은 이웃일 뿐이다.
거리는 한 발자국 남짓한 만큼이 적당하다.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외로움과 그것을 감당할 여력이 있는 환경뿐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을 기대하다 지치지 말자.
스스로를 둔덕 삼아 일어서서
먼 들판을 바라보자.
그곳엔 신선한 바람과, 푸르른 벌판과,
누구와 의견을 다투지 않아도 되는 평온이 있다.


세상이 두렵지 않게 느껴지는 날은 언제일까.
두려움이 무뎌지는 그날을 기다리다
이 생이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통보다는 고독을 선택하게 된다.
늘 곁에 머무는 존재보다
머물다 흐르는 바람 같은 벗들을 위해
둥지를 열어둘 뿐이다.
기대는 더 슬프게 만든다.


어제, 강아지 산책 후 빨아 널어둔 원피스가
욕실에 걸려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사람이 서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웃기지 않은가.
평생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사람을 두려워하는 게 바로 사람이라니.

내일은 월요일.
책방이 쉬는 날이다.
언제나 함께 떠날 여행 메이트를 기다려왔지만,
이제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혼자라도,
지금 떠나야겠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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