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음의 춤, 조르바에게 배우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by 기빙트리

“그래, 알겠다. 조르바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크레타 섬의 바람, 석회 가루가 흩날리는 광산, 낡은 산투르의 현을 튕기며 춤추는 남자.

그의 이름은 조르바였다. 소설의 초반, 화자는 조르바를 만나고 이렇게 고백한다.

살아 있는 가슴과 푸짐한 언어를 가진, 곡괭이와 산투르를 동시에 다루는 사나이.

그는 일과 예술, 노동과 유희, 본능과 자유를 한 몸에 지니고 산다.

‘아직 모태의 태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라는 묘사는, 그가 삶의 본질에 얼마나 가까이 붙어 사는지를 단번에 보여준다.

처음엔 나와 닮은 화자에게 마음이 갔다. 사색하고, 책을 읽고, 고뇌하는 지식인.

그러나 조르바를 만나고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생각하기보다 먼저 움직였고, 망설이기보다 먼저 사랑했다.

바닷가에 앉아 태양을 바라보며 포도주를 마시다가도, 광산에서 피투성이로 일하다가도, 그는 산투르를 꺼내 흥얼대며 춤을 추었다.

조르바는 말한다.


“보스, 말이라는 게 뭐요? 바람이요. 살아야 해요. 눈으로 보고, 입으로 먹고, 여자를 안고, 울고 웃고… 그게 인간이지.”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내가 쌓아 올린 언어와 사유가 잠시 허공으로 흩어지는 듯했다.

책상 앞에서, 서가 앞에서, 혹은 계산과 주저의 경계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살아 있음’보다 ‘말해짐’을 선택해 왔던가.

그는 가난한 과부를 사랑했고, 아들을 잃었으며, 죽은 광부의 가족을 돌보았다.

그렇다고 고통을 외면하지도, 위로의 말로 봉합하지도 않는다. 조르바는 다시 말한다.


“보스, 괴로우면 괴롭다고 울어요. 울면서 노래도 해요. 그게 인간이지.”


그는 이중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층적인 삶 그 자체다.

몸과 마음, 기쁨과 슬픔, 사랑과 상실이 서로를 지워 버리지 않고 한 무대 위에서 공존한다.

소설의 후반부, 조르바가 춤춘다.

삶의 모든 순간을 통과해 온 그가,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보스’를 향해 춤을 춘다.

그 장면에서 나는 문장을 넘길 수 없었다.

마치 눈앞에서 그가 맨발로 모래를 차며, 바람과 파도를 끌어당기듯 춤추는 것만 같았다.

그 춤엔 슬픔과 기쁨, 허무와 열정, 그리고 자유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설명보다 앞서는 한 가지 — ‘살아 있음’이었다.

책장을 덮은 밤, 가만히 누워 생각했다.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이론과 언어로 삶을 감싸 왔던가.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계산 속에 하루를 흘려보냈던가. 조르바는 속삭인다.


“인생이란 건 뭔지 아오? 한 번 사는 거요, 보스. 그리고 그 한 번을, 제대로 살아내야지.”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창밖을 한 번 더 오래 바라보았다.

책을 펼칠 때는 줄거리가 아니라 그 안의 호흡을 들이마시려 했다.

무언가를 할까 말까 망설일 때면 조르바의 얼굴을 떠올렸다.


“해요, 보스. 해보는 거요. 망치든, 춤이든, 사랑이든, 해봐야 아는 거요.”


어쩌면 조르바는, 우리가 잠시 잊고 지낸 삶의 본래 얼굴을 품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가 존재했기에 — 혹은 그가 책 속에서 지금도 존재하기에 —

오늘의 한 걸음 더 삶을 향해 용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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