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죽일 놈의 시청률

20년 넘게 함께 한 애증의 숫자놀이에 대하여

by 온작가



매일 오전 6시 정도에 기상해서

후배 작가들의 대본을 검수하고

큐시트 작업도 미리 해 놓고

아이템도 좀 찾고 하는 것이

내 하루의 첫 일과들.


그러다 보면

어떨 때는 6시 50분경,

또 어떨 때는 7시 반, 8시...

어김없이

카톡 진동이 울린다.

센터장님의 시청률 카톡.


6시대에 울리는 진동은

아주 저조한 성적을 전할 때가 많다.

잠결에 시청률을 확인하시고

급 흥분 + 좌절하며

바로 전달을 한 것이기에

시간대가 그렇게 이른 것.


그때부터

7시 반, 8시,

어떨 때는 10시 넘어까지

시간차 공격 카톡이

이어진다.


이대로는 안 된다,

너무 심각하다,

대안을 빨리 찾아야 한다...


그런데 7시 반, 8시

좀 여유 있게

숫자가 찍힌 날은

대부분이

평타 이상은 친 날.


그래서 매일 아침

6시 30분경부터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긴장을 하게 된다.

핸드폰을 들기도 싫다.

특히나 매주 시청률이 저조한

코너 하나가 있는데,

그 코너가 방송된 다음 날 아침은

눈을 뜨기 싫을 정도...


아주 가끔

센터장님이 바쁘셔서

시청률 톡이 안 올 때도 있지만

일주일에

못 해도 사흘 정도는

이런 아침을 보내고 있는 나.


소수점 이하의 숫자에도

일희일비하면서.




이렇게 20년을 살았다.

20년을 살았어도

쿨하게 넘겨지지가 않는다.

정말 애증의 숫자인 거다.


물론 당연히 시청률, 아주 중요하다.

방송국은 광고로 먹고사는 곳인데

시청률이

굉장히 중요한 기준이 되니까.


특히 내가 하고 있는

연예뉴스 프로그램이

사실 뭐 그렇게 거룩한 의미가 있을까.

무조건 재미가 있어야 하고

무조건 시청률이 잘 나와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


성적이 저조할 땐

당일 방송 대본을

많이 바꿔야 되는 경우도 생기고,

어떨 땐 아이템 하나가

그냥 날아가기도 하는데

그걸 쓴 후배 작가에게

'다음에 꼭 부활시켜볼게'

라고 하지만

그녀도 나도 안다.

부활은 불가능하다는 걸.


후배가 얼마나

공들여 작업했는지 알기에

아이템이 아예 공중분해될 때는

정말 많이

자책하게 되는 거 같다.


'어제 다 컨펌해주신 건데

잡자기 엎으시면

이걸 쓴 작가의

시간과 에너지는

어디서 보상받나요??'

라고 따지고 싸워야 정상일 수 있는

메인작가의 자리인데

단 한 번도 그렇게 못 했던 나.


마구 흥분해서

다다다다다 하는 사람한테는

일단은 맞춰주고

불합리한 부분에 대해서는

회의 때 조곤조곤 얘기하는 게

서로의 심정적으로도

또 결과적으로도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번이나 대본을

휴지통에 넣었을 후배를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그럴 때 나의 무능력함을

심하게 탓하곤 한다.


그런데 또 어쩌다 한 번씩

'머선 일이고' 싶을 정도로

시청률이 잘 나올 때가

있기는 있다.

그럼 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정말 '애증'의 관계 그 자체.


내일은 그나마

찍힐 숫자가 없는 날이라

(주말엔 방송을 안 했으므로)

비교적 편한 아침을

맞이하겠지.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이 일을 언젠가 관둔다면

그 죽일 놈의 숫자놀이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무척이나 속 시원하면서도

무척이나 허전할 거라는 것.

매일 아침, 매 회의 때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심장이 튀어나올 거 같은

경험을 하고 있으면서도

'허전'이란 말을 떠올린 걸 보면

아직 덜 힘들었나 보다^^


그런데 유튜브 콘텐츠를

같이 하고 있는 지금은

'조회수'까지 신경 써야 된다는 현실......

아... 숫자놀이는 방송작가의 숙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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