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애교가 많아진 32개월 딸이 '엄마~'하며 천사 같은 웃음소리를 낼 때도 온전히 기뻐할 수 없게 됐습니다. 아기를 온 품으로 안으며 함께 웃지만, 그 끝은 기쁨이 아닌... 애매한 감정.
마흔을 훌쩍 넘긴 나를 두고 '귀여워 죽겠다'는 남편이, 모두가 인정하는 '사랑꾼'다운 말과 행동을 해도 온전히 감동할 수는 없게 됐습니다. 분명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데 그 끝은 감동이 아닌... 애매한 감정.
2019년 10월의 그날 이후 제 감정 회로는 도착지를 잃었습니다. 아빠가 췌장암 선고를 받던 그날 이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하던 길이었습니다. 며칠 전, 엄마 아빠와의 통화에서 아빠가 요즘 몸이 안 좋아 계속 병원에 다니면서 검사를 하고 있었고 췌장 혹이 발견돼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었어요. 천만 다행히도 암 같은 건 아니고 그냥 혹으로 결론이 났지만 그래도 수술을 해야 한다고, 그 수술을 위해 더 정밀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출근길, 그 결과를 듣기 위해 엄마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었어요. 당연히 '별 거 아니래. 혹 떼어내기만 하면 된대'라는 대답이 돌아올 거라 예상했었고... 그조차도 우주 최강 겁쟁이인 우리 아빠한테 얼마나 긴장되는 결과일까 싶어 마음이 많이 쓰이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답이 돌아왔어요. '놀라지 마'로 시작됐던 엄마의 말... 검사 결과는, 암이라고 했습니다.
암...
암...
암......
평소 즐겨보던 다큐 프로그램 <명의>를 통해서나 접할 수 있었던 단어... 저랑은 아주 먼 세계의,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던 그 단어가 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창에 떠 있다는 게 일단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처럼 버스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든가 소리소리 지르며 어딘가로 뛰어간다든가 그런 드라마틱한 행동으로 이어지지도 않았어요.
그냥 멍...
한 다섯 번쯤 다시 확인하고서야 떨리는 손으로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엄마 괜찮아? 있다 전화할게'
괜찮을 리가 1도 없을 엄마에게 '엄마 나는 괜찮으니 나까지 신경 쓰고 걱정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 와중에도 맘 여린 막내딸을 걱정하고 있을 엄마 아빠가 너무 눈에 훤해서 애써 담담한 척했던 것 같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답을 마치니 버스는 회사 앞에 도착했지요. 같은 버스에 탔던 친한 후배가 인사를 하기에 '우리 아빠가 암 이래...'라는 얘기를 입 밖으로 꺼냈는데 내 입으로 대체 무슨 말이 나오고 있나 싶었습니다.
우리 아빠가 암 이래...
우리 아빠가 암 이래...
우리 아빠가 암......
놀란 후배가 걱정의 말을 건넸지만 그녀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거기에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그래도 일은 했습니다. 꾸역꾸역. 시간이 갈수록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제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어서 정말 꾸역꾸역, 간신히 해 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편을 붙들고 그제야 대성통곡을 했어요. 그제야 실감이 났습니다. 그제야 '암'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도, '바로 내일부터 항암치료를 시작한다'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문장도 더는 거부할 수 없는 나의 현실 속 단어와 문장임을 알았습니다.
아빠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우주 최강 겁쟁이인 우리 아빠, 얼마나 무섭고 막막하고 겁이 날까... 그런 아빠의 모든 상태와 감정을 공유하게 될 엄마는 또 얼마나 무섭고 막막하고 겁이 날까... 나는 어떤 비루한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 두 사람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른 채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행히 그 누구도 울지 않았어요. 서로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한 것 같습니다. 정말, 제발, 부디 괜찮아지길 바라는 간절함의 표현이었겠지요... 어떤 말로 마무리를 한 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긴 꿈이길 바라며 침대에 누웠어요. 눕자마자 눈물이 막 흘렀습니다. 당시 백일을 바라보고 있던 딸 하온이가 깰까 봐 숨죽여 울었는데 우습게도 아기의 쌔근쌔근 숨소리가 그땐 그렇게 위로가 되더군요.
그날 이후 2년 5개월 정도가 지났고 아빠는 이십 여 차례의 항암치료를 했으며 항암을 쉬고 있는 지금 하루 두 시간씩 운동하고 식사도 잘하면서 너무 다행스럽게도 잘 버텨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무슨 하늘의 장난인지 그놈의 몹쓸 코로나 때문에 아빠 보러 가지 못한 지도 꽤 오래... 그 시간 동안 아기는 부쩍 자라 쫑알쫑알 수다쟁이에 웃음 가득 애교쟁이가 됐지요.
아픈 아빠와 힘든 엄마에게 그 어떤 부담도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내 앞에 놓인 삶을 더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 저...
그 시절의 건강했던 아빠를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못할 일이 없겠다는 생각만을 가득 담은 채 매일매일을 쉼 없이 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