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크게 틀고 지나가는 중년 남자
언젠가였을까.
자전거를 타며 옛날 워크맨 같은 모양을 한 라디오 한 개를 자전거 앞에 장착하고 달리는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나이는 한 60대쯤 됐을까. 요즘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긴 하지만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그 사람을 돌아보게 된 건, 동네를 쩌렁쩌렁 울리듯 크게 울려 퍼지는, 그의 라디오에서 나는 소리 때문이었다. 정확한 곡조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구성진 트로트 한 구절이었던 것 같다. 그 중년 남자는 그렇게 그 음악을 친구 삼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었다.
사실 그땐 고운 눈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엄연히 있는 곳에서 혼자만 듣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소음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라디오를 그렇게 크게 들으며 가는 그 중년 남자가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라면 이어폰을 끼거나, 아니면 그냥 음악은 잠시 꺼둔 채 자전거 타는 데만 집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나이가 들면 어떤 상황에서도 이렇게 얼굴이 두꺼워질 수 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도 약간은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그런 모습을 한, 한 남자를 다시 만났다.
트로트 프로그램이 전성기를 이루던 그때, 경연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그 가수의 팬이 된 그 중년 남자는 작은 딸에게 그 흥이 나는 멋진 음악을 너무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라디오는 아니지만, 휴대폰 앱을 켜서 유튜브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그 가수의 노래를 틀어준다. 반경 2미터 정도에서는 충분히 들릴 크기로.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딸은 그 노래를 함께 듣기보다는, 이렇게 크게 노래를 튼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지적하기 바쁘다. 바로 나와 우리 아버지다.
아이를 낳고 난 뒤, 부모님을 보는 눈은 많이 달라진다. 부모님이 나보다 먼저 걸어온 부모라는 길, 내가 그 길을 갈 때마다 우리 부모님은 어떠셨을지를 늘 곱씹게 된다. 그리고 부모님에게서 나의 미래를 만나기도 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오가듯, 육아를 통해 부모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믿기지 않게 아버지의 나이는 67세가 되셨다. 내가 초등학생이었고 아버지가 30대 한창이었던 그때엔 쓰지 않았던 돋보기안경을 디자인 별로 몇 개나 모으고 계시고, 목이 늘 불편하신지 늘 베개를 새로 사서 바꾸어 쓰신다. 새치 정도로 보였던 아버지의 흰머리는 이제 염색을 하지 않으시면 머리 전체에 뒤덮일 정도로 아버지의 온 머리를 뒤덮게 되었고, 예전보다 다리는 가늘게 예쁘지만 배는 더 볼록하게 튀어나오셨다.
아빠가 큰 소리로 말씀을 하시고, 또 음악을 들려주실 때. 왜 그러셨을지 이젠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30년 전의 아빠와, 지금의 아빠 사이에는 엄청 오랜 시간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이 한 사람에게서 어떤 것을 주었고 어떤 것을 앗아갔는지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내가 좋은 그 어떤 것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을 수도 있고, 그의 세월이 뛰어났던 청각적 능력을 앗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때론 귀에 이명이 들리신다며 불편하신 듯 귀마개를 꽂으시는 아버지를 보면, 자전거를 타고 큰 소리로 라디오를 틀고 지나간 그 중년 남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왜 그 중년 남자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은 왜 또 전부 그와 같은 중년의 모습인지를 곱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