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를 받아들이기로 한 남편은 보름 정도 뒤 그곳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그야말로 피난민처럼 짐을 싸들고 올라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편의 얼굴색은 연탄도 '형님' 하고 부를 정도로 새까맸고 크기는 반쪽이 되어있었다. 마음이젱가의 결정적 조각을 꺼낸 것처럼 와르르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나는 웃으며 남편을 맞이했다
그저 우리 결혼생활 중 일 막 일장이 끝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남편과 식탁에 앉아 아무 일도 없듯 밥을 먹었다.
삶이 신기하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한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식탁에는 앉아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화장실은 가야 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만큼 일상은 구체적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했다.
퇴직금을 계산했고 실업급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장롱 속에 아이들 돌반지가 몇 돈이나 남아있는지 생각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내게 주신 금반지도 떠올렸다. 최대한 가진 것들을 끌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도 구직을 하겠다고 얘기하자 남편은 너무서두르지는 마라며 오히려 나를 말렸다. 안 좋은 상황일수록 서로 팀워크를 발휘해야 하는 게 부부라는 것을 처음 느꼈다. 아이들의 동요를 막기 위한 방안도 의논했다. 중학생인 아들과 초등학생인 딸에게 어떻게 얘기할지를 정하는 것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한 가지씩 앞으로의 계획이 정해졌다. 남편의 계획만 빼고....
다른 것은 다 팔아도 둘의 결혼반지는 남기기로 했다
사실 명퇴 전화를 받고 나서 나는 많이도 울었다.
남편이 너무 불쌍했다.
소처럼 일밖에 몰랐던 남편이었다.
성실하고 착하기만 했던 남편이었다.
하청직원들 한 명 한 명에게 반말 한번 써 본 적 없는 남편이었다.
그래서 그냥 생각만 하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돈 아낀다고 좁아터진 원룸에서 가족 없이 생활하게 한 것도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 그 눈물을 뚝 멈춰버리게 한 남편의 선언.
짐을 대충 정리하고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흠..... 나 있잖아 딱 한 달만 쉴게."
"아니야 더 쉬어도 돼. 서두를 필요 없어."
"음 그러니까 딱 한 달만 쉬고.... 나 9급 공무원 시험 준비할 거야!"
"???????!!!!!!!"
나이 사십삼 세가 다 끝나가는 마당에 공무원 공부라니.....
이삼십 대 창창한 아이들도 힘든 판국에 흰머리 삐죽거리는 사십 대가 공무원이 웬 말인가 싶었다. 마치 구직을 포기하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일단 한 달 푹 쉬고 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