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나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될 수 있다는 주말부부 상태였다. 대기업에 다녔던 남편은 금요일 밤마다 ktx를 타고 집에 왔다가 6끼를 성실하게 먹고 월요일 새벽에 다시 내려갔다. 우리의 일상은 평온했고 아들과 딸은 착하게 자라나고 있었으며 더 이상의 욕심도 바람도 없이 선물 같은 시간들을 누리며 지냈다.
그날도 역시 그런 날이었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나서 달달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아침방송을 봤다.
말도 안 되는 아침드라마지만 어느새 빠져들어 악역 여배우에게 욕을 퍼부었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뒤이어 건강프로를 고3 학생 인강 듣듯이 열심히 시청하며 장수만세를 다짐했다.
그런데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집전화로 거는 유일한 사람은 남편뿐이다.
전화벨 소리가 그날따라 조금은 짜증스럽게 조금은 애절하게 들렸다.
당시 받았던 골동품수준의 우리집 전화기
"무슨 일이야?월요일 아침부터~~ 지금 티브이에서 중요한 얘기 하는데~"
나는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남편은 말이 없었다.
'흡~후~, 흡~후~' 하는 숨소리만 들렸다.
아마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 같았다.
직감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 아.... 어쩌냐..... 나 명퇴자 대상에 올랐다.... 아...... 나참...... 이유를 모르겠네......"
그 순간 거대한 오함마가 내 뒤통수를 세게 치고 땅에 떨어지는 거 같았다.
신년 새해도 아닌데 머릿속에서 보신각 타종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났다.
"아니 왜? 당신이 왜?"
"나도 모르겠어....... 이유를 모르겠어....
한번 사정해볼까? 그만둘 수 없다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 아니야! 그러지 마!! 그냥 짐 싸서 올라와!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좀 쉬어. 그냥..... 그냥 빨리 정리하고 올라와!"
무슨 이유인지 나는 너무도 멋있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대출금, 생활비, 아이들 교육비...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무슨 난리통에 피난 떠나야 되는 것처럼 남편에게 계속 빨리 짐 싸서 올라라는 말만 반복했다.
오함마 맞은 듯 정신이 나간 건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건지 대책도 없이 전업주부인 내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중에 남편은 나의 그 말이 너무 고마웠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에게 백지영의 노래 '총 맞은 것처럼'의 가사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말은 지금까지 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