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에요?
스타트업의 시간은 느린듯 빠르게 흘러갔다. 팀에 합류한지 1년반 정도가 지나자 처음엔 10명도 되지 않았던 인원이 40명 정도로 늘어났고, 사업의 규모도 성장했다. 회사 규모가 커지는 만큼 내부적으로는 업무에 대한 세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한 명이 다양한 종류의 일을 어떻게든 커버하고 어떻게든 되게 하는게 중요했었지만 점점 한가지 분야에서의 그 일을 잘 할 사람이 필요한 단계로 옮겨가는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조인한지 대략 2년 6개월쯤 되던 시점에 대표님과의 미팅 자리에서 새로운 제안을 받게 되었다. 경영진들이 개발팀 산하에 있던 프로덕트 팀을 독립 조직으로 분리하기로 결정했는데, UX 담당이었던 내가 프로덕트 전반을 리드할 PM(Product Manager)으로 직무를 전환하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디자인 실무는 거의 직접 하지 않고 있었고, 사실상 프로젝트 기획과 관리을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이미 나는 일반적으로 알려져있는 PM의 업무를 어느정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제안을 받은 이후 단순한 나의 생각으로는, 이미 하고 있는일에 추가적으로 프로젝트 발제와 우선 순위 결정에 더 깊이 관여하는 정도의 업무가 더해지는 정도이기 때문에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 장점 중 하나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장점을 발휘할 기회가 될 수도 있을것이었다. 물론 개발 백그라운드가 부족한게 약점이었지만, 모든 걸 다 갖춘 인재는 없으니까!! 거기에다 지금보다 회사 경영상황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전달받고, 결정 권한도 넓어진다 하니 새로운 세상을 보고싶은 마음이 컸다.
이렇게 호기롭게 직무를 전환하고 일을 시작했지만... 늘 그렇듯 스타트업은 챌린지의 연속이다. 분명 회사와 R&R을 정리하고 업무를 시작했음에도, 실제로 내가 하는 업무와 내게 기대되는 업무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곧 느끼게 되었다.
나는 PM으로서 업무를 시작하면서, 프로젝트를 계획을 잘 세우고, 진행시키고, 굴러가게 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젝트 하나가 시작되면, 나는 다음 프로젝트를 할 준비에 들어가서 목표를 세우고, 리서치와 같은 밑작업을 선행하다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새 프로젝트를 내보내는 일을 했다. 그리고 이 패턴이 망가지지 않도록 자원을 적절히 배분하고, 부족한 자원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든 보완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최선을 다했다. 프로젝트 담당자들에게 백그라운드를 이해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스콥이 변경되지 않도록 모니터링하고, 결정이 필요한 지점에서는 결정을 내리고 사이드로 오는 운영 업무들은 그것 대로 쳐 나갔다. 참, QA 인력이 부족하면 테스트 서포트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회사는 내가 좀 더 상위 레벨의 일을 하기를 원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상위 레벨의 일이라고 표현하니 조금 모호한 감이 있는데, 회사는 문제를 더 예민하게 감지하고, 새로운 기회는 더 민감하게 발견하며, 해야할 것을 명확히 결정해 강하게 추진하는 사람을 바랬다. 그렇다... 나는 프로젝트 매니저에 가까운 롤을 수행했고, 회사는 프로덕트 매니저(혹은 스크럼에서의 프로덕트 오너)를 원한 것이다. 이 시각의 온도차를 느끼자, 마치 길을 잃은 것 처럼 정말 막막했다. 당장 프로젝트에서 발을 뺄 수도 없는 상황이고, 내 롤을 나눌만큼 팀 내 인력이 여유 있지도 않았다. 그럼 사람을 채용하자는 결론이야 금방 나왔지만, 내 롤이 스스로 명확하지 않은 시점에서 무슨 일을 할 사람을 뽑을지 결정하는데만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이 당시의 혼란 얘기하려면 날 잡아야 한다.)
팀 내 리소스가 부족해 실행 단의 일에 발이 묶여 있던 것도 사실이지만, 사실 핵심 문제는 상위 레벨의 기획과 의사 결정이 이제부터 하겠다고 결심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업무를 하기 위해서 더 포괄적인 정보와 상황에 대한 이해와 조력자가 간절했다. 정보와 조력자를 구할 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 구하려면 구할 수야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필요한 리소스를 구하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의 공유된 목적을 향한 정당한 절차가 아닌, 프로덕트 팀의 업무를 위한 부탁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모두 공감하겠지만 심리적으로 어려운 절차는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포기하게 되는 경향이 생긴다.
'그렇게 크리티컬한 자료는 아니니 나중에 기회되면 보지 뭐'
결론적으로 말하면 능력부족이었다. 항변을 하고 싶은 억울한 마음도 저 구석에 조금 남아있지만, 제안을 받고 수락했다 함은 이제 책임은 내 몫이라는 뜻이다.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지 못한 것 또한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내게는 소위 말하는 판을 짜는 능력, 좀 고급스럽게 말하면 리더쉽이 없는 게 결정적인 문제였다. 내게는 사람들을 끌어가는 능력이 없다는 걸 그때서야 절감했다. 슬프게도 나는 원래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경험이 있어야 배우는 사람이기에, 또 이렇게 깊은 좌절을 겪어야만 내게 부족한 것이 뭔지 알고 보완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을 참 오랜만에 진지하게 해보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괴롭던 이 시기에도 당연히 성장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전에 그랬던 것 처럼 몇가지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서 배운 것이 아니라, 나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 하다 어느날 보니 내가 성장해 있었다는 점이다. 직무 전환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를 비교해보았더니, 내게는 원하는 답을 끌어내고 내 의견을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더 효율적인 스킬들이 장착되어 있었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상황을 좀 더 심플하게 생각해야 한다. (고민 많은 사람 기준)
어떤 선택에도 그에 따라오는 노이즈는 항상 있다. 중요한 것은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행할만한 가치가 있는 결정인지에 주목해야 한다.
리더쉽의 종류는 다양하다.
흔히 생각하는 리더쉽에 대한 편견에 사로 잡히면 괴롭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일을 할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중심이 잡히면 커뮤니케이션 방법 같은 스킬들은 그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면 된다.
권한은 주었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준 후에 주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어야 생긴다.
이건 아직 남아있는 내 억울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소심하게 적어보았다.
주변에서 PM으로 직무 전환을 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근데 신기한 건 정말 괴로운데도, 별로 후회는 안되더라는 점이다. 내가 스스로 잘하는 PM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보니, 그럼 도대체 나는 뭘 하는 사람인지, 앞으로 뭘 해야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고민의 결론은 난 나를 직무에 가두기 보다는,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분명 프로덕트를 만들고 개선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걸 위해 필요한 스킬들을 갖춰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하기로 결정했다.
"UX 스킬을 갖춘 프로덕트 만드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