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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루 Feb 12. 2018

Day 99 정선 - 올림픽의 힘

1,500명이 넘는 주자들의 정보를 관리하면서 종종 이름이 너무나 뇌리에 박히는 주자들이 있다. 그 중 한 명이 성은 현이고 이름은 외국 이름을 쓰는 독일 국적의 주자였다. 연예인이 아닌데 내 머릿속에서는 ‘반드시 실물을 확인해보고 싶은 주자’로 점찍혔달까.


오늘은 그 주자가 뛰는 날이었다. 집결 시간 10여분 전, 그 주자가 전화를 했다. 알파인 경기장인데 CP까지 어떻게 가는지를 모르겠단다. 그러면서 본인이 한국어가 서투르니, 옆에 있는 사람을 바꿔줄테니 그 사람에게 CP로 오는 길을 설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당황스러움! 전화를 넘겨 받은 사람은 주유소 아저씨였다. 네비게이션에 정선군 여성회관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더니 이게 웬 걸, 그 차에 네비게이션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 궁여지책으로 정선군청까지 오는 길을 안내해달라고 했고, 군청 근처에 오면 주위에 사람들이 있을테니 그 사람들에게 정선군여성회관을 물을 수 있도록 쪽지에 한국어로 정선군여성회관을 적어 주자에게 주십사 부탁을 했다. 20여분이 지났을까? 주자가 전화를 다시 걸어서는, 군청까지는 왔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르겠고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더 늦으면 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우리 스탭 두 명이 그 주자를 찾아 차를 끌고 나갔고, 우리 차가 앞에 서고 한 스탭이 주자 차를 운전해 간신히 CP에 도착을 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봉송로에 나갈 때 주자들은 주자 셔틀을 타고 나가지만, 가족이나 지인들은 그 셔틀에 탈 수 없다. 그런데 이 주자의 아내는 한국어도 서툴고 영어도 편하지 않은 독일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 우리 스탭들이 응원 나가는 차량에 아내를 태워서 나가기로 했다. 마침 나도 오늘은 봉송로에 나가게 되어서 그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길을 달렸다.


한국에 온지는 3년이 넘었고, 쭉 강릉에 살면서 서울과 부산 등지를 여행했다고 한다. 한국에 온 이유는 올림픽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서. 내 귀를 의심했다. 나이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무리 남편의 모국이라 하더라도 올림픽을 위해 낯선 나라에 와서 3년 이상 지낸다는게, 그것도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서 와있었다는게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엇이 이 사람들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걸까? 신기하고 대단하다.


주자 아내는 주자가 뛰는 슬랏만 응원을 하고 본대 뒤에 붙어 따라오는 우리 차를 타기로 했고, 나와 나머지 스탭들은 남은 우리 주자 슬랏도 모두 응원을 한 뒤에 차에 타기로 했다. 헥헥 거리며 뛰다 모든 응원을 끝내고 폰을 봤더니, 차를 운전하던 스탭에게서 메시지가 와있었다. 주자 아내가 안 보인다고, 혹시 보이면 같이 타라고. 한국어를 못 하는 독일인이, 영어도 안 통할 정선 산골짜기에서 영하의 날씨에 길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했다. 일단 차에 타서 다시 봉송로를 되짚어 가다보니 목도리 안으로 고개를 묻은 채 걷고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후아 진짜 다행이었다.


주자와 주자 아내


올림픽이 끝나면 독일로 돌아갈 두 분에게 올림픽 기간 동안 즐거운 추억이 잔뜩 쌓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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