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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 Mar 14. 2022

휴학 후 첫 알바의 경험

간호학과 학생은 어떻게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되었나 - 4

간호학과 1학년을 마치고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휴학을 하게 되었다. 간호학과에서 휴학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기에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때는 졸업을 하면 바로 간호사로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휴학을 하면 1년 늦게 취업을 하게 되니 그 공백을 설득해야했다. 그래서 내건 조건 중에 하나가 모든 생활비와 월세를 내가 벌어서 직접 부담하는 것이었다. 서울이 좋아서 서울에 갔는데 휴학을 대구에서 해버리면 상경을 한 이유가 없어지는 것 같아 휴학 생활을 서울에서 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휴학계를 내고 교수님의 승인까지 받고 나니 '돈'에 대한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커미션 같은 작은 일들로 돈을 벌긴 했지만 정말 용돈 수준이었고 내가 생활할 만큼의 돈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 시간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아 알바몬과 알바천국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울이기만 하면 지역은 상관없었기에 서울 전체를 염두에 두고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러던 중 노량진에 있는 학원에서 영상 편집 알바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고, 영상 편집 툴을 다룰줄 알았던 터라 바로 지원했다. 최저시급이었지만 9시부터 6~7시까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하는 아르바이트여서 급여는 꽤 될 듯했다. 사무직이었고 간단한 영상 편집만 하면 된다고 쓰여있어서 주 6일을 일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직원 자리였는데 휴가 동안 잠시 알바를 구하는 거라 3~6개월 정도 일할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도 마음에 들었다. 3개월 정도 바짝 일하고 다음 기간에는 그 돈으로 놀러다닐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라인으로 지원을 하고 나니 금방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자고 해서 학원에 방문을 했다. 현장 강의도 하면서 그것을 촬영하여 약간의 편집을 거쳐 인터넷 강의 서비스도 하는 학원이었다. 과장님이라고 하는 분이 면접을 봤는데 촬영과 편집을 담당하고 있고, 원래 편집팀에는 직원이 한 명이어서 내가 알바를 하게 되면 과장님과 둘이서 일을 하게 될 거라고 했다. 과장님은 '베가스'라는 영상 편집 툴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 툴을 다룰 줄 아냐고 물어보셨다. 베가스는 중학교 때 써보고 그 뒤론 쓰지 않아서 단축키 같은 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고 있어서 대차게 할 수 있습니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집에 가서 열나게 인터넷을 뒤져 공부했지...


여튼 무난하게 합격을 했고 다음주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다. 아직 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었던 터라 지하철을 타고 40분 정도를 통근했다. 출근길 지하철이 왜 지옥철이라고 불리는지...  알게 된 시간이었다. 처음 출근을 해서 학원이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배우고, 촬영팀이 촬영을 해서 메모리를 가져다 주면 어떤 작업을 거쳐서 어떻게 사이트에 올리는지도 배우고, 정리하는 법부터 출퇴근 시간을 입력하는 법까지 배웠다. 하루만에 쏟아지는 정보에 정신이 없었지만 첫 아르바이트였던만큼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서 필기를 하며 익혔다.


내 자리는 앉으면 63빌딩이 보이는 자리였는데 두 명이 앉으면 꽉 차는 좁은 사무실에다가 환기할 수 있는 창문도 없었지만 풍경이 좋아 행복했다. 환기가 안 돼서 머리가 자주 아프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아르바이트생일 뿐이고, 돈을 받고 그에 대한 일을 해주는 것뿐이지 그 회사에 대한 애사심이나 충성심은 가질 필요가 없는데 그때는 첫 사회생활이어서 잘해내고 싶다는 의욕이 넘쳤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나를 괴롭히게 되었지만.


내가 무언가를 잘해내면 잘해낼 수록 과장님은 나에게 더 많은 일을 요구했고 그 일을 내가 맡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애사심을 강조했다. 그리고 내가 사회초년생이라 (첫 알바인 것을 과장님이 알고 있었다) 잘 모르는 것이라며 자신이 가르쳐주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일을 나에게 다 떠넘겼고 9시에 출근해서 8시가 넘어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 시간에 과장님은 개인적인 쇼핑을 하거나 알바인 나만 놔두고 퇴근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그 영상 마무리 작업과 업로드는 다 나의 일이 되었다.


일을 후딱 해치우고 잠시 쉬고 있으면 원래 일은 찾아서 하는 것이라며 혼냈다. 점심시간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고 밥은 무조건 과장님이랑 같이 먹어야 했다. 그리고 30분만에 후딱 먹고 오면 바로 일을 시작해야했다. 과장님 커피 심부름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과장님이 이수해야 하는 교육을 나에게 떠맡기며 구글에서 답을 찾아 문제를 풀라고 시킨 적도 있었다. 학원에서 중요한 스트리밍 이벤트를 했는데 그걸 나에게 떠맡겨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니 그것도 못하냐며 혼내기도 했지. 


편집일을 어느 정도 익숙하게 해내자 이제 촬영팀의 업무까지 떠맡게 되었다. 교시 시작시간에 맞추어 학원을 둘러보며 촬영 세팅을 도와주고 문제를 해결하는 일까지 맡았다. 하루종일 학원을 뛰어다니니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었다. 촬영팀이 부족하면 내가 투입되어 직접 촬영도 했다. 그럼 촬영하고 나서 편집을 해야 해서 야근은 그냥 당연한 일이었다. 점점 내가 하는 일은 많아지는데 과장님의 가스라이팅은 계속 되고 쉴 수도 없으며 돈도 최저시급을 받으니 많이 지쳤다. 최저시급(그땐 753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인데도 한 달에 180만원 넘게 벌었으니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 알 수 있다. 출근하기 싫어 새벽 내내 울기도 했다.


그러면 그냥 그만 두면 됐었는데... 촬영팀이 그만두려고 하면 나에게까지 히스테리를 부렸던 기억에 그 말도 쉽게 못 꺼냈다. 결국 버티지 못해 그만두긴 했지만 과장님 번호를 차단하고 그날은 폰도 꺼둘 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아빠가 전화 와서 괜찮다고 위로해줬지만 그때는 내가 책임감이 없고 나약해서 도망쳤다는 죄책감 때문에 나를 많이 자책했다. (지금은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 다 쓸 순 없지만 훨씬 어른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힘들었고, 성적인 접촉을 하는 사람도 만났었고, 점점 더 많이 요구되는 업무량에 정말 사회란 이런 것인가? 생각될 때도 있었다. 후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좋은 어른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다행히 깨달았지만.


이 기억하기도 싫은 첫 알바에서도 배운 점은 많았다. 시킨 일을 빠르게 해낸다는 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니구나. 내 권리를 침해당하면 어느정도 요구할줄 알아야 하는 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선까지는 세상과 타협해야 사회생활이 가능하구나 등등.


다음부터는 너무 일에 과몰입하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기한이 있는 일은 최대한 기한에 맞추어 제출을 했고 너무 빨리 해서 쉬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없게 했다. 나를 향한 험한 말은 교훈만 익히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연습도 많이 했다.


그래도 돈은 꽤 됐고 월세를 내고도 남는 돈 덕분에 그 다음에는 단기 알바식으로 돈을 벌면서 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아직 그 학원을 보면 트라우마가 올라와서 노량진에는 잘 가지 않지만 그래도 배운 점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살아가는데 적용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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