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학과 학생은 어떻게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되었나 - 5
그렇게 첫 번째 아르바이트를 찝찝하게 그만두고 나서 며칠간은 아무 생각 안 하고 놀았다. 한창 오버워치에 빠져있을 때라 PC방에서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 게임을 하기도 했다. PC방 알바분이 끓여주는 라면은 왜 그렇게 맛있는지... 하필 또 자취방 1분 거리에 PC방이 있어 거의 집처럼 지냈다.
첫 번째 아르바이트에서 꽤 많은 돈을 모아두긴 했지만 남은 월세와 생활비를 모두 감당할 정도의 돈은 아니었기에 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시작했다. 대신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 필요는 없었으므로 일주일에 이틀 정도 일하는 알바로 찾아봤다. (매일 출근하는 거에 질린 탓도 있었다.)
화, 목만 출근하는 영어학원 카운터 아르바이트 공고가 올라와서 바로 지원했다. 출근하려면 버스 환승을 해서 가야하는 먼 거리였지만 시급도 높았고 근무 시간도 마음에 들어서 면접을 보기로 했다. 찾아가니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조그마한 학원이었는데, 그 동네 아이들이 죄다 그 학원에 다니는지 아이들로 북적북적한 곳이었다.
처음에 원장님과 면접을 보는데 편안하게 대해주시면서도 나를 존중해주시는 게 보여서 기분이 좋았다. 여기라면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확 가기도 했다. 경희대 출신이라고 하자 너무 좋아하시면서 마침 선생님 한 분이 신혼여행을 가서 중학생 수업할 사람이 없었는데, 간단하게 강의 해줄 수 있냐고 하셔서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실전에 투입됐다. (?)
카운터 일은 다음에 출근해서 배우기로 하고 급한대로 중학생 애들 수업에 투입됐다. 시제 문법에 대해 알려주고 애들이 문제를 잘 푸는지 보고 설명해주면 된다고 하셨다. 다행히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과목이 영어였기에, 강의를 하는데에 무리는 없었다. 초등학교 때 내게 문법 개념을 탄탄히 잡아준 학원 선생님께 속으로 감사인사를 하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중학생 시절은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른의 입장이 되어 아이들을 보니 정말 어리구나 싶었다. 처음 보는 선생님한테도 재잘재잘 떠들며 말을 붙여오는데, 참 귀여웠다. 그 아이들 사이에서도 작은 사회가 형성되어 누구는 누구랑 사귀고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니 어린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다. 여튼 다행히 첫 번째 수업을 잘 넘기고, 다음 주부터 그 학원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화, 목에 출근하시는 분이 갑자기 그만두게 되어서 내게 인수인계를 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원장 선생님이나 강사님이 해주시기에는 너무 바쁘고 카운터 일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셨다. 그래서 월, 수, 금에 일하시는 분이 간단하게 인수인계 노트를 적어 놔두고 갔다. 카운터 일을 정리한 파일도 따로 있어서 직접 읽어보고 익혔다. 생각보다 일이 많고 복잡해서 당황했지만 스스로 일을 잘한다는 이상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다 할 수 있다고 열정을 불태웠다. 선생님들께 어떻게 하냐고 여쭤보면 친절하게 알려주시기도 하셨다.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학원 청소였다. 애들이 우다다다 뛰어다니기도 하는 학원은 하루만 청소를 하지 않아도 먼지가 풀풀 날렸다. 먼지 알레르기가 있어 쓸고 닦으면서 수없이 코를 훌쩍거렸지만 청소를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청소를 다 하고 나면 얼추 근처 유치원이 마칠 시간이 된다. 주로 초등학생, 중학생이 다니는 영어 학원이었는데, 초등학생 형이 이 학원에 다녀서 같이 따라다니는 유치원생이 한 명 있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유치원에서 학원까지 데려다 줄 사람이 없어서, 유치원생 픽업도 카운터 알바의 일이 되었다. 2분 거리에 유치원에 가서 아이가 하원하면 손을 잡고 학원으로 오는데, 그 시간이 내겐 힐링이었다.
처음에는 낯을 가려 내게 말도 잘 안 하던 아이가, 시간이 차츰 지날 수록 정을 붙여왔다. 후에 학원을 그만둘 때도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게 이 아이였다. 내가 그만두면 또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정을 붙이기까지 오래 걸릴 텐데, 괜히 미안했다.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학원으로 오는 길이면 그 아이의 하루 일과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 자기가 저번 주말에 가족들이랑 강화도에 가서 대게를 먹었는데, 아주 맛있었다고 선생님도 꼭 먹어보라고 했던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가끔 유치원에서 받은 사탕 같은 걸 내게 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귀엽고 또 귀엽다.
아이를 데리고 학원에 오면 초등학생들도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 온다. 그럼 먼저 컴퓨터가 있는 강의실에서 학원 프로그램으로 학습을 진행한다. 각자 컴퓨터로 학습을 하기에 내가 가르쳐줄 건 없지만, 애들이 떠들거나 놀지 않게 관리하고 가끔 아이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했다. 초등학생들을 지도한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 깨달은 경험이었다. 한 명을 조용히 시키면 다른 한 명이 떠드록, 여기서 싸우고 저기서 소리 지르고...
이 외에도 학원 책 재고가 비면 전화해서 주문하고, 애들 워크북 채점해주고, 부모님 오면 차 내드리고 학원비 결제해드리고, 전화 받고 등등의 일이 모두 내 일이었다. 그럼에도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었던 것은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들은 모두 나를 어른으로 대해주셨고 무언가를 시키시면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으셨다. 그 중 한 선생님은 정말 프로페셔널 하셔서 롤모델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일이 고되도 사람이 좋으면 버틴다는 말이 이거구나, 몸소 느꼈다. 그 전의 알바 경험과는 정말 상반되었기에 더 체감했던 것 같다.
그 전의 알바는 사람을 대하는 알바는 아니었어서 여러 사람을 이 알바를 하면서 참 많이 만났다. 진상 아빠도 만났고, 정말 어떻게 손을 댈 수 없는 아이도 만났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께 배웠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다문화 가정의 아이를 놀리는 다른 아이들에게, 오히려 이 친구는 한국어도 하고 중국어도 하고 이제 영어도 할 거니까 너네보다 똑똑하다고 했던 선생님의 대처였다.
물론 마냥 좋았던 건 아니었다. 대구에 내려가야 해서 그만둔다고 원장님께 말씀 드리자, 같이 일하던 선생님이 "왜요, 시급이 적어서 그래요?" 라고 하는 걸 듣고 내가 적은 시급을 받고 일하고 있었구나 깨달았다. 그 전까지는 강의를 하면 더 많은 시급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그냥 아르바이트니까 이렇게 받고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또 하나 깨닫는 계기로 여겼다.
첫 번째 알바는 참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은 반면 두 번째 알바는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 모든 경험은 교훈으로 남았다 치자.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인가? 고민하는 사람이 되자.
왜 사회생활을 해보라는 건지 알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