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콩 Aug 30. 2016

언어와 사고로부터 탈출 중

세네갈레인 줄 착각하고 있는 하얀 뚜밥의 이야기


 께베메르 옆 빌라지인 롱뿔을 8월 한 달 사이 몇 번을 갔었는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친구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또 새로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특히나 프랑스 봉사단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프랑스인에 대한 엄청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기주의에, 딱닥하고 도시적이고 사무적이며 그 어떤 마음적으로 정하나 둘 곳 없는 나라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롱뿔에서 R군과 C양의 생선을 사서 그릴에 구워달라 부탁한 후 두 양손으로 양파소스를 버무리며 손가락을 쪽 빨며 맛을 보는 그들의 모습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또 이곳에서는 프랑스인들이 특히나 돈을 많이 쓰는 편이다. 네고를 많이 하지 않고 알면서도 그냥 말도 안 되는 바가지요금을 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두 친구는 나와 함께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요금과 싸웠고 C양은 내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던 것이었다. 또 다른 A라는 한 친구는 개발학을 공부하는 친구였는데 내가 이곳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또 다른 방법을 가르쳐 줬던 것 같다.  사실 처음에 나는 그가 프랑스인이 아니라 세네갈래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했다. 그 정도로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하고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의 대화에서 그는 본인의 나라인 프랑스가 매우 좋지만 씁쓸하고 속상한 점도 많다고 했다. 또 나의 프랑스인에 대한 선입견에 대해서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며 좋지 못한 모습이라고 했다. 그는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잃을 것이 많다며 그것이 살아가는데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이제야 21세가 된 그 아이는 나이답지 않게 매우 성숙했던 것이다. 지난 주말 나는 그 친구와 또 친한 세네갈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3일간 시간을 함께 보냈다. 사실 이곳에서 지내며 내 집만큼은 꼭 한국스럽게 해두고 지내고 싶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또 나를 잘 아는 내 측근들 몇 외에는 집에 초대를 잘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A라는 친구의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다른 방법 때문인지 그들을 '현지인'이 아니라 정말 '내 친구', '내 동생'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나는 스스로 편견이나 선입견을 안 가지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무의식 중에 가진 선입견들로 당황스러운 상황을 마주 할 때가 있었다. 물론 모르는 것보다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무의식 중에 최빈국이기 때문에 나는 이들을 '도와'야 하고 그들보다 잘난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A를 만나면서 많이 들었다. 생각보다 나 스스로가 나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여하튼, 그를 통해 조금 더 선입견과 편견의 장벽에 금을 낼 수 있었단 사실에 놀라웠다. 


사고에 갇힌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다. 또 언어에 갇힌다는 것 또한 매우 무서운 일이다. 그 사고를 깨고 나면 사실 별일 아니었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인데 두려움으로 꽁꽁 나를 묶은 후 이곳은 안전한 곳이라며 안도한다. 젖는 것에, 더러워지는 것에 두려워했던 적이 있다. 아니, 사실 여전히도 두렵고 마음 한편 지진난 곳을 움켜쥐곤 두렵지 않다 주문을 욀 뿐이다. 하지만 한번 젖고 나면 다시 해가 뜨기에 말리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러워지고 나면 옷은 빨면 그만인데 이 단순한 것을 그 어떤 사고에 갇혀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했다. 얼마 전 비가 억세게 내리던 날이었다. 베란다 텃밭 아이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수를 하곤 집 청소를 하는데 창문 밖에서 아이들이 부른다. 


"빈따!! 빈따!!"


"응?"


"우리 빗물에 샤워하자!!" 


"지금?"


"응! 우리 집으로 얼른 와!" 


열 살, 열세 살 남짓한 옆집 꼬맹이들이다. 두려움을 눈을 꾹 감고 대답했다. 


"응! 지금 갈게!! 기다려!" 


그리곤 옥상에서 빗소리에 아이들 웃음소리에 마음껏 뛰어놀며 비를 맞았다. 우리는 줄 넘기도 하고 춤도췄다. 언젠가 엄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무서워져. 두려움이 커지는 것 같아."

내가 아는 너무나 용감했던 우리 엄마였기에 이 말이 이해가 가지가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내가 언제부터 비에 맞아 옷이 젖을까 두려워했을까?라고 생각해보니 점점 나이가 들수록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많아지고 그다음 과정인 미래를 위해 지금의 나에게 포기라는 것을 많이 시키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미래는 또 그다음의 미래를 위해서 또 포기를 시킬 예정일 것이다. 나는 내 삶이 아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나의 미래를 위해서만 살아왔던 것이다. 온몸에 비를 흠뿍 적시고 나니 더 이상 젖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옥상에 올라가 비를 맞았고 별이 많은 날은 모기장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누웠다. 


동네 친구 중에 아마두 밤바라는 친구가 있다. 아마두는 핸드폰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한다. 가끔 핸드폰을 고쳐주기도 하고 핸드폰 케이스, 핸드폰, 배터리 등 이런 것들을 파는 일을 한다. 얼마 전 충전기를 사러 갔다가 아마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두는 작고 귀여운 바바카라는 아들이 있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는 아빠가 일하는 동안 아빠 곁에 있기 위해 아빠 옆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두 역시 한국에도 이런 가게가 있냐며 한국에서 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 엄청 많이는 아니더라도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지내고 있는데 왜 그러냐고 물었다. 


"지금 버는 돈으로는 아이들 먹고 생활하는 것밖에 못해. 모을 수가 없어."


"좀 더 열심히 하면 잘 할 거야! 힘내 아마두"


"한국에 가고 싶어. 세네갈은 별로야."


"왜 그렇게 생각해?"


"한국은 돈이 많잖아. 세네갈은 돈이 너무 없어."


"아마두, 그렇게 생각하지 마. 한국에선 사람들이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도 많아. 새벽에 시작해서 밤늦게까지 일하고 종일 일만 하는 사람들이 많아. "


"종일 일하면 좋지! 돈을 많이 벌잖아!"


"아마두, 네가 그렇게 일하면 너는 바바카와 이렇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 그래도 괜찮니? 내가 어릴 때 엄마, 아빠 모두 일을 늦게까지 하셔서 집에 나와 내 동생뿐이었어. 열 두시 넘어서야 집에 돌아오시고 아침 일찍 일하러 가셨기 때문이야.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너무 외로웠던 것 같아. 돈이 물론 없으면 힘들지만 돈 때문에 바바카와의 소중한 시간들을 잃지 마. 더 중요한걸 너는 지금 함께 하고 있는 거야. 그래도 네가 한국에 가길 바란다면 비자를 한번 물어볼게. 어떻게 초대할 수 있는지. "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는 바바카를 너무 사랑해. 우리 가족들과 함께 하는 건 참 중요한 시간들이야. "



나의 유년기에 부모님께서 바쁘게 지내셨다는 것에 대해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었다. 또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밤 열두 시가 지나 귀가하셔도 내가 이야기하고 싶어 하면 새벽 네시 다섯 시까지 졸린 눈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랬기에 나의 선택들을 어느 순간에도 의심하지 않으셨을 테다. 하지만 조금 가난하더라도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더라면 좀 더 따듯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돈이 많아야 한다는 사고에 갇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돈이 없다는 것은 불쌍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또 부끄러운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한국에서의 관계 형성에는 너무나 많은 돈이 필요로 했다. 술을 마셔야 하고, 외식을 해야 하고, 유흥을 즐기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대학 때 부모님의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고 지냈었다. 다달이 나가는 월세와 공과금, 생활비들을 백만 원에 가까운 돈을 고정적으로 지출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아르바이트로 보내야 했다. 어느 순간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일들을 정리하고 최소한의 일만을 하며 지냈었다. 그렇게 나의 삶은 가난해져 왔다.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려웠고 한 번의 외출로 내 삶에는 큰 타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럽고 나 자신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돈이 없는 것은 불쌍한 일이 아니라 조금 불편한 일이었는데 괜한 자존심에 아닌 척- 하고 넘어갔었다. 내가 불쌍했던 것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과 단절을 해버렸다는 것이었다. 멍청하게도 말이다. 


 그 프랑스인 친구 A군은 받은 생활비를 대부분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사용한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더 값진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이곳에와 세네갈래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 "나 돈 없어." "돈 좀 줘" "나 이거 좀 줘" 이런 말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함께 여행하는 것도 두려웠고 함께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언어에, 사고에 갇혀버린 것이다. 하지만 A군은 함께하기 위해 기꺼이 나누어줄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이번에 우리 동네인 께베메르 여행에도 A군이 모든 비용을 내며 아이들을 이끌고 왔던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주말을 가질 수 있었다. 암흑 속의 길을 달리며 별을 보며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도 했고 옥상에서 음악 틀어놓고 마음껏 춤도 추고 비도 맞았다. 물론 절대 사수했던 내 집이 매우 더러워지고 엉망이 되었지만 그건 청소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전 15화 사랑이 어렵다는 나에게 그가 던진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