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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Jul 08. 2022

ENFP의 연애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지금 벌어진 일은 지난 순간들이 만든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일희일비해서 결국은 잘못된 판단을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벌어질 일이었다. 하루하루 버티고 참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좋은 날이 될 거라는 희망은 어쩌면 덜 아프기 위한 자기 위안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별일 없는 날이 없었다. 열과 성을! 다해 공들여 출연자를 꼬셨다. 오랜 설득 끝에 방송 출연을 오케이 했다가 돌연 잠적하기도 했다. 곧 생방인데 망할 컴퓨터가 멈춰 방송 원고가 날아가 손 떨며 토하고 있을 때 메인 언니가 원고를 대신 정리해줘 방송한 날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 쌓이니 오히려 별일 없으면 불안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몇 년째 제야의 종소리를 방송국 편집실에서 들어도 그러려니, 며칠째 집에 못 들어가 한겨울에 보일러가 터졌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다 열정이 있으면 이겨낼 수 있다는 로또 같은 말만 믿으면서 말이다. 열정은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사그라들었다 노예근성에 인정받고 싶어 안달하며 청춘을 다 보냈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던 남자가 유학을 갔을 때는 그 남자한테 보낼 책에다 옷까지 산다고 월세도 못 낸 적도 있었다. 방송이 죽어버려 한 달 생활비는 0이었는데도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머리에 총맞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미친 짓이었다. 다 어려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을 있는 대로 다 줬으니 후회는 없다. 오히려 끝까지 마음을 내주어야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다는 걸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다.  


어쩌다 시작한 연애도 결국 망했다. 친한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두고서는 결국 아프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구구절절하게 헤어진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간 친구들은 "그 남자가 널 사랑하는 거 같지 않다. 다른 여자가 있네, 선수네 선수. " 이런 이야기를 해도 "그런 거 같지?"라는 추임새로 이야기했지만 결국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나의 연애의 끝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혼자 타오르던 사랑은 가랑비에도 꺼져 버렸다


스무 살 때부터 내 연애는 쪽팔리는 일의 연속이었다. 엄한 사람 짝사랑하다 또 혼자 상처받고 자기 비하하다 자잘하게 끝이 났다. 맥주잔이 무거울 새 없이 들이붓다가도 급억울해졌다. 남들 다 하는 연애, 왜 이리 나는 어렵냐고.  

연애에 선수가 어딨어. 그리고 이기고 지고가 어딨어. 하는 마음이었지만. 결국 졌다. 그리고 구차하게 구구절절하게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기가 쪽팔렸다. 안 이쁜 나를 탓하다가도 돈 없는 나를 탓하다가도 바쁜 일을 탓하다가 무작정 집 앞 산으로 올라갔다. 집에 있으면 더 쪽팔렸다. 자꾸 잡생각들이 들이쳐서 더 쪽팔렸다.


연애에 지고 이기고가 어딨어, 그랬는데 결국 또 졌다


씩씩대며 산에 올랐다. 바람은 시원했으나 땀이 많이 났다. 열받아서 더 더웠다. 나를 사랑하라는 말이란 대체 뭘까. 남을 사랑하는 내 마음에만 귀를 기울였지 나는 어떤지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다. 나는 왜 힘든 건지, 왜 힘들어도 아닌 척하는 건지. 애쓰면 애쓸수록 어긋났다. 원래 그곳에 있던 나무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게 좋은 건지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이제와 보니 나는 전형적인 ENFP였다. 인터넷에서 퍼온 특징은 이렇단다. 참나, 나네, 나야.



ENFP 연애 특징

1. 콩깍지가 심함. 한번에 깊이 빠져듬

2. 사람을 되게 좋아함

3. 많이 퍼주지만 쉽게 상처받음

4. 사람들에게 잘 맞춰주어서 그만큼 빠르게 지침

5.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그만큼 빨리 식기도 함

6. 다정한 성격으로 리액션 및 공감을 잘 해줌

7.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다가감


돌아보니 짝사랑하다 잘 안 된 것도, 제대로 된 연애라고 믿고 돌격했지만 팽 당한것도 다 내가 빠르게 지쳤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나를 안아주고 '너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나를 위로해줬더라면 결혼도 빨리 했을텐데. 마흔 가까이 돼서 막차 타고 결혼해보니 알겠다.

결국 온갖 말도 안되는 이유로 다 지던 연애 끝에 나를 알아봐주는 한놈만 있으면 그놈만 패자.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와 가장 잘 지내기'가 제일 중요하다.


스스로에게 친절하세요. 이는 어려운 주제에 접근하는 데 가장 중요한 태도입니다. 오랜 시간 힘든 일을 하는데 마음 맞지 않는 동료와 하고 싶지는 않지 않나요? 자기 자신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자신을 친절하게 돌봐주시길 바랍니다.
-허준이 박사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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