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서였다. 친구가 마지막으로 나를 만났을 때 내 목에 둘러주었던 목도리에서 났던 냄새가 훅 코를 스쳤다. 둘러보니 친구의 목도리, 친구의 바지를 아버지가 입고 계셨다. 친구는 180이 넘은 키, 아버지는 165를 좀 넘는 작은 체구셨는데 황망히 떠난 아들의 옷과 목도리를 입고 계셨다. 본인에게는 너무 큰 아들의 옷을 왜 입고 목도리까지 하고 계셨을까. 친구는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어머니를 두고 왜 도대체, 왜 그랬을까.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장례식장에서는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진 한 장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부모보다 먼저 떠났고 자살이기에 손님도 별로 없고 서둘러 화장터로 떠나기 바빴다. '왜'라는 질문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떠나지 않는다.
친구가 스스로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만난 사람이 나였다. 겨울이었고 눈이 아니라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더 추운 날이었다. 친구는 목도리를 내 목에 둘러 주었다. 비 오는 거리를 좀 걷다가 헤어질 때는 내가 다시 친구에게 목도리를 되돌려주었다. 그때 목도리에서 나던 냄새가 지워지기도 전에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
친구를 잃어버린 슬픔은 너무 커서 뱉지 못하는 큰 알사탕 같은 것이었다. 볼이 얼얼해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내가 그 친구를 좋아하는 것을 다 눈치채고 있었다. 그가 한국을 떠나 2년간 프랑스로 유학을 가 있었을 때도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사람은 무얼 할까 생각했었다. 하늘로 몸을 던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큰 알사탕을 입에 문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하필 나였다. 친구를 구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한동안 맨 정신으로 살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버스가 커브를 돌 때나 가요무대에서 허공에 오버액션하는 트로트 가수들의 노래를 듣다가도 왈칵 울음을 쏟던 시절이 있었다. 친구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 같아서 낯선 나라들의 골목을 헤매기도 했다. 친구의 죽음이 믿기지 않아 마주치기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골목을 헤매다가 크로아티아의 묘지 앞 젊은 남자의 무덤 앞에서 목 놓아 울기도 했다.
친구가 살다 간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점점 줄어들었다. 친구의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님도 결국 기억을 잃으셨다. 친구를 기억하는 이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도 마음이 아렸다. 그러다 결국 슬픔은 정말 거짓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기도 했다. 사라지지는 않지만 옅어져서 아득해졌다. 그의 친구들은, 그리고 내 친구들은 오늘도 회사를 가고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집을 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 나만 잘살아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잊히고, 잊고 살았다.
충분히 울고, 애도하는 '슬픔의 쓸모'는 거기에 있었다. 온 마음을 다해 좋아했으므로 후회 없었고 온 마음을 다해 그의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친구가 여기에서 행복하지 않았다면, 거기에서는 행복하기를 바랐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은 상처를 주고 관계를 피로를 남긴다. 슬픔은 나를 탈진하게 했지만 그 탈진이 끝나면 오히려 텅 비어 가벼워지기도 한다.
그래,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야. 탈진과 긍정, 인정 그 무한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나는 나이 들었다. 그리고 충분히 울고 나서야 충분히 행복해져도 된다는 위안을 얻었다. 그제야 싹을 틔우는 개나리도 보였다. 충분히, 봄은 오고 있었다.